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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쿠뜨락/이태종 요한 신부

순교(9)
차쿠지기 2025-04-24 21:23 조회 195

순교(9)

 

막 순교자성월을 보냈다. 벌써 2년째, 이 좋은 가을날에 성지순례도 제대로 못 가고 순교자성월만 보내버렸다. 그러면 순교자들은 어떤 분들인가? 그 무시무시한 형벌을 초인적 인내심으로 견뎌낸 분들인가? 맞다. 그러나 가장 정확한 정의는 아닐 것이다.

 

순교자들을 이런 관점으로 볼 수도 있다. 10마리의 사냥개를 풀어 노루를 잡는 사냥꾼이 있다고 하자. 끝까지 쫓아가 노루를 잡아 바치는 견공이 주인에게는 충견일 텐데, 그러면 끝까지 쫓아가 노루를 잡는 데 성공하는 견종은 어떤 견종일까? 다리가 튼튼하고 족보까지 있는 명견일까? 아니다. 그 사냥감을 두 눈으로 본 견공이라고 한다. 맨 처음 사냥감을 보고 튀긴 견공이라는 것이다. 보지 못한 사냥개는 가파른 언덕이 나오거나 시야에서 멀어지면 포기한다. 그러나 사냥감을 본 견공은 그것이 자꾸 눈에 어른거려서 물을 건너고 산을 넘어서, 죽어라 하고 목표를 향해 매진하여, 끝내 성공해 낸다는 것이다.

 

순교자들도 하느님을 본 사람들이다. 마음의 눈으로 그 나라를 본 사람들이다. 천국이 하도 좋아서, 자꾸 눈에 어른거려서 포기할 수 없었던 분들이다.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줄수록 곱절로 되받음을 체험한 분들이다. 하느님을 위해 고통을 당하면 당할수록 달콤한 사랑에 더 빠져들었다. 이것은 어쩌면 철저히 기브앤테이크일 수 있다. 드린 만큼 되받았던 봉헌의 기쁨이 있었다. 처음엔 물질을 드렸을 것이다. 모든 재산을 버리고 산속에 들어갈 적엔 가난을 봉헌했고, 이어 정결과 순명까지 바쳤다. 다 바치고 남은 것이 생명밖에 없었을 때 생명마저 봉헌한 분들이 순교자들이다. 왜일까? 그들이 본 대상은 그렇게 마음을 끌어당기고도 남았다. 억지로 견뎌서가 아니었다. 기쁘게 봉헌했다.

 

최양업 새 사제도 여섯 번째 편지에서 만일 제 맘대로 했다면 저는 벌써(순교하여) 저세상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게 하느님의 뜻과 장상의 명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했다. 순교하고 싶어도 순교할 수 없었다. 한강 이남의 신자 수만 15천에 육박하였다. 유일한 조선인 사제로서 어떡해서든지 교회를 지켜야 했다. 신자들에게 성무를 집전하기 위해 1365일을 매일 순교하듯 12년간을 길 위에서 살았다. 아니 그건 산 게 아니라 하루하루 생명을 봉헌해간 것으로 봐야 옳다. “생명의 봉헌이 순교일지니, 사제 최양업은 날마다 일상생활에서 점진적으로 순교를 완성해 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