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이태종 신부가 2021년
수도권 가톨릭 잡지 “비타곤”에 12개월 동안 연재했던
재 중국 한국 천주교 성지를 소개한 12곳 중에서
해당 지역인 북경 서만자 마가자만 추린 글이다.
북경
연경(북경)을 다녀오는 조선의 사신단을 연행사燕行使라고 불렀다. 사행원으로 뽑히면 진작 다녀온 선배들이 연경 가면 꼭 구경하라고 이르는 연경팔경이 있었다. 태액추풍太液秋風 등 도합 8곳이다. 언젠가부터 두 가지가 추가되어 연경십경이 되었다. 나머지 한 곳은 모르겠지만, 1783년 이승훈이 동지사 서장관인 부친을 따라 연행사로 나섰을 무렵, 추가된 볼거리로는 기둥 하나 없이도 입이 딱 벌어질 높이로 쌓아 올린 서양식 건물과 거기 가야 볼 수 있다는 코 크고 눈 파란 백인이니, 곧 서양 선교사였다. 그렇지만 이승훈은 구경이나 하려고 북당의 그라몽 신부를 찾아간 게 아니다. 몇 년 전부터 천진암과 주어사를 오간 열띤 토론의 결과들이 격하게 등을 떠밀고 있었다. 이렇게 북경교구는 조선교구의 모교회로서 태기胎氣를 띠고 있었다.

이 태아의 씨는 스스로 날아와 발아하여 자생한 것이니, 민들레 종자 같은 그 정체를 밝힌다면 <천주실의>라는 한문 서학서이다. 이승훈이 연행행로에 등 떠밀린 것도 이벽, 권철신, 권일신, 정약종, 정약용 등의, 도대체 <천주실의>의 진원을 찾고 또 다른 서학책을 구할 수는 없느냐는 빗발친 요청 때문이다. <천주실의>는 이미 1601년, 자명종이란 선물 하나로 명나라 황제 만력제 곁에 입경한 마테오리치의 역작이다. 실로 북경교구의 복이라 할 수 있으니 이 마테오리치의 타계 후 아담 샬이라는 과학자 출신이 못지 잖은 후계를 맡았다는 점이다. 아담 샬은 흠천감欽天監이란 천문대장의 벼슬까지 달고 천주교를 비약 발전시킨다. 이 두 선교사를 후원했던 권력가를 빼놓을 수는 없다. 서광계라는 인물은 상해 시절 마테오리치에게 바오로라 세례를 받는다. 정말 다행인 것은 이 서광계가 명, 청을 연이어 승승장구한 인재형 권신이라는 점이다. 이같은 일은 이자성이라는 자가 난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불가능할 터였다. 농민군에 몰린 명의 마지막 황제가 자금성 뒷산에서 목을 맸고, 심양에서 명분만 노리던 청은 복수를 해주겠다며 북경에 그냥 무혈입성했기 때문이다. 명ㆍ청의 평화로운 정권교체가 서광계를 건재케 했고, 북경의 천주교도 발전일로일 수 있었다. 물론,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가 뒤늦게 들어와 의례논쟁(제사문제)을 일으키기 전까지이다. 어쨌든 막차도 떠난 북당에 끝까지 남아 있던 그라몽 신부가 이승훈에게 조선의 첫 세례를 준 것은 ‘뿌린 대로 거둔’ 예수회 나름의 결실이라 할 것이다.
북경에는 동당, 서당, 남당, 북당이 있는데 남당, 북당은 필히 들러야 할 곳이다. 마테오리치가 터를 잡고 아담 샬이 크게 신축했다는 남당보다는 몇 년 전 주교좌가 되었다는 북당에서의 미사 집전이 감동적이었다. 미사 경문을 읽을 때 어머니 교회의 심장 박동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북경에는 마테오리치와 아담 샬의 묘역도 있다. 또 기왕에 북경을 찾았다면 자금성, 천단, 이화원, 만리장성, 용경협의 볼거리를 추천하는데, 여름철의 자금성은 극구 피했으면 한다. 그 더위를 피할 데가 없다. 물론 중국인들이 자칭 세계 3대 요리 중 하나라는 북경 오리야, 자동으로 먹게 되어 있다.
서만자
서만자(西灣子시완쯔)는 조선 초대 교구장 브르기에르 소주교님이 꼭 일 년 동안(1834년 10월 8일∼35년 10월 7일) 체류한 곳이고, 김대건-최양업 신학생의 유학로이기도 하다. 현주소는 하북성河北省 장가구시張家口市 숭례구崇礼區, 북경에서 서북 쪽 팔달링 만리장성을 넘어야 한다. 왜 조선 주교님이 반대 방향으로 열흘길을 더 가셨을까? 보호권(Padroado) 때문이다. 당시 교황청에서 강대국에 선교사 안전과 비용을 부탁하며 교회의 권한까지 주었는데, 북경 이남이 포르투갈 관할이니 프랑스인인 소주교님이야 눈치껏 떠나야 했다. 그렇다고 멀리 가지도 못했다. 북경에 오는 조선 밀사들에게 자기 교구의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필자는 2014년 순교자 성월, 심양의 선교사 수녀들과 서만자 순례를 갔다. 1000킬로가 넘는데도 고국을 떠나 “혼자 사는 사람” 넷이, 모국어로 성가를 하고 가곡도 부르다 보니 어느새 서만자 성당 같은 곳에 도착했다. 일개 ‘현縣’이었으니 한국의 ‘읍邑’ 정도 되는 규모의 도시였다. 아, 그런데 서만자 성당이 아니라는 거였다. 5분 더 가면 큰 성당이 나온다는 거였다. 지금 것도 중국으로 치면 인구 700만 명의 대도시에 1개 있을 법한 큰 성당인데, 기껏해야 7만 명 정도일 서만자에 성당이 또 있단 말인가? 그런데 진짜 5분을 가니 어마어마한 대성당이 나타났다. 완공 직전인 외관이나 내부가 명동성당의 2배는 되었다. 어떻게 이 오지에 대성당이 두 개나 될까? 우리 나름대로는 중국통들인데도 여기가 정말 중국인가 싶었다. 더 놀라운 것은 뒷산이 하나 있고 그 꼭대기를 지키는 교회 묘지였다. 일견 예스러운 비석에 새겨진 연도를 보니 300∼400년 전이나 된다. 선교지에 뼈를 묻은 벨기에의 주교 신부 수녀들이다. 그 산꼭대기에서 한눈에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일행 중 누군가가 혼잣말했다.
“그냥, 여기 눌러서 살고 싶다.”
그도 그럴 것이 늦은 점심이나 먹자고 읍내를 걷는데 도대체 길바닥이 중국 것이 아니었다. 깨끗했다. 어, 꽁초 하나 없네, 하며 올려다본 읍내 아이들 눈동자에는 70, 80년대 한국 주일학교 미사를 마치고 나온 착하고 명랑한 빛들로 총총했다.

1년 뒤에는 심양신학교 교수인 조건신부와 서만자를 갔다. 조신부가 마가자 출신이니 먼저 마가자에 들러 서만자로 가는 험로를 탔다. 토박이가 ‘이 길이 진짜 서만자 옛길’이라며 ‘승덕承德 지역’이 ‘열하熱河 교구’라 할 때는, 박지원 선생 생각도 나서 1200킬로가 지루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만자 본당 유신부를 만나고는, 덜컥 묻고 말았다. “큰 성당을 짓는 돈이 어디서 나느냐?” 대답인즉슨, 3,000좌석 이라고 했다. 인구의 90%가 신자인데 젊은 부부가 북경에서 돈을 벌면 50%를 봉헌한다고 했다. 그 말에는 필자도 지갑을 털지 않을 수 없었다.
또 1년 뒤엔 선물을 싣고 갔다. 부속 건물로 기념관도 짓는데 한국의 첫 주교인 소주교님과 김대건 신부님 사진을 걸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일 년 후 필자는 대문짝만한 사진 2장에다 1장을 보태며 정색을 했다. “최양업 신부님인데, 이 사진도 걸어야 다른 사진을 주겠다.” 유신부는 그 조건에 분명 고개를 끄덕였었다. 아! 어쨌든 2022년이 되면 서만자 성당이 세계의 주목을 받을 것이다. 베이징 동계 올림픽의 주무대가 서만자이기 때문이다. 차쿠 신부인 필자는 그 동계가 기다려진다. 집이요 일터요 성전인 차쿠로 가는 비자 문제가 모름지기 수월해질 것이리라. 또 그래서 서만자에 가면, 먼저 기념관을 들어가 최신부님 사진부터 확인해야겠다.
마가자
적잖은 공돈이 생겼었다. 그래서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 박사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을 거다. “차박사님, 발 노릇은 제가 할 테니, 브레인 역할만 해주시면 됩니다!” 연속해서 한 통의 전화를 더 했다. 당시 몰래 다니던 충주 모 중국어 학원의 조선 동포 여교사였는데, 가족이 중국 연변에 살고 있었다. “네, 네, 선생님. 2004년 7월 5일 월요일, 심양 공항에서 남편분 차 안에 가이드랑 기다리라고 해요. 마가자를 가는데 지도만 있어요.” 그때, 그러면서도 신이 나질 않았다. 난생처음 외국을 나가는 데도 꼭 과거로 이동하여 초대 브뤼기에르 소蘇 주교님의 현장을 간다는 마음에, 또한 겁나지도 않았다.
그렇게 21년 전, 마가자馬架子 (내몽고자치구 적봉시赤峯市 송산구松山區 동산향東山鄕)를 가고 싶었고, 아직도 가고픈 것은 소주교님이 하셨다는 이 한마디 때문이다.
“여기(샴)에 영원히 살 것처럼 머무르고, 내일 (조선으로) 떠날 것처럼 준비하겠습니다.”
‘조선 선교사 파견’에 대한 부정적 조항에 대해 조목조목 제언한 다음, 자신이 가겠다고 하며 쓰신 이 말씀에는 여태, 선교사의 혼이 번뜩대고 있다. 바로 그 혼 위에 1831년 9월 9일 한국 천주교가 독립, 설정될 수 있었다. 임께서 쓰러져 묻혔던 북만주 뺄리구 마을 아, 마가자! 그러나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길도 없는 길을 갔던 행로, 그때만 생각하면 자꾸 가보도 않은 연옥이 떠오른다. 필자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의 낙후된 모습이었다. 가옥의 꼬락서니도, 사람의 행색도, 전설 마냥 피어오르던 길의 끝에 나타나 준 십자가와 비로소 천주당이라는 간판! 희한하게도 성당을 보자마자 이제 더는 연옥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어머니를 지나 할머니의 뱃속에까지 가서 닿은, 고색 짙은 아늑함 같은 거였다.

다음 날 조반을 들기도 전에 묘역을 참배했다. 막 십자성호를 그으려는데 뒤에서 차박사의 벅찬 음성이 퍼졌다.
“신부님, 소련 할 때 소蘇 자요. 소주교님 무덤이 맞아요! 유해는 서울교구 100주년 때 중국인을 통해 이장했고, 이 마가자 묘지를 순례하는 한국인은, 우리가 처음입니다.”
최양업 김대건의 유학길로도 마가자가 유력시된다고 했다. 심양에서 곧장 산해관을 거처 북경에 이르는 연행로는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 때문에 어려웠다고 했다.
“션푸神父, 동넨 작아도 올 부활에 우리 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