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자
적잖은 공돈이 생겼었다. 그래서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 박사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을 거다. 차박사님, 발 노릇은 제가 할 테니, 브레인 역할만 해주시면 됩니다! 연속해서 한 통의 전화를 더 했다. 당시 몰래 다니던 충주 모 중국어 학원의 조선 동포 여교사였는데, 가족이 중국 연변에 살고 있었다. 네, 네, 선생님. 2004년 7월 5일 월요일, 심양 공항에서 남편분 차 안에 가이드랑 기다리라고 해요. 마가자를 가는데 지도만 있어요. 그때, 그러면서도 신이 나질 않았다. 난생처음 외국을 나가는 데도 꼭 과거로 이동하여 초대 브뤼기에르 소蘇 주교님의 현장을 간다는 마음에, 겁나지도 않았다.
그렇게 17년 전, 마가자馬架子 (내몽고자치구 적봉시赤峯市 송산구松山區 동산향東山鄕)를 가고 싶었고, 아직도 가고픈 것은 소주교님이 하셨다는 이 한마디 때문이다.
“여기(샴)에 영원히 살 것처럼 머무르고, 내일 (조선으로) 떠날 것처럼 준비하겠습니다.”
‘조선 선교사 파견’에 대한 부정적 조항에 대해 조목조목 제언한 다음, 자신이 가겠다고 하며 쓰신 이 말씀에는 여태, 선교사의 혼이 번뜩대고 있다. 바로 그 혼 위에 1831년 9월 9일 한국 천주교가 독립, 설정될 수 있었다. 임께서 쓰러져 묻혔던 북만주 뺄리구 마을 아, 마가자! 그러나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길도 없는 길을 갔던 행로, 그때만 생각하면 자꾸 가보도 않은 연옥이 떠오른다. 필자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의 낙후된 모습이었다. 가옥의 꼬락서니도, 사람의 행색도, 전설 마냥 피어오르던 길의 끝에 나타나 준 십자가와 비로소 천주당이라는 간판! 희한하게도 성당을 보자마자 이제 더는 연옥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어머니를 지나 할머니의 뱃속에까지 가서 닿은 고색 짙은 아늑함 같은 거였다.
다음 날 조반을 들기도 전에 묘역을 참배했다. 막 십자성호를 그으려는데 뒤에서 차박사의 벅찬 음성이 퍼졌다.
“신부님, 소련 할 때 소蘇 자요. 소주교님 무덤이 맞아요! 유해는 서울교구 100주년 때 중국인을 통해 이장했고, 이 마가자 묘지를 순례하는 한국인은, 우리가 처음입니다.”
최양업 김대건의 유학길로도 마가자가 유력시된다고 했다. 심양에서 곧장 산해관을 거처 북경에 이르는 연행로는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 때문에 어려웠다고 했다.
“션푸神父, 동넨 작아도 올 부활에 우리 성당 2000명 넘게 나왔어요.”
엊저녁 늦도록 손짓 발 짓으로 대화를 나누었던 이곳 신학교 지망생의 말이 맞는다면, 대체 저 황토 구릉마다 모두 토굴이라도 파고 산다는 말인가?
앞으로도 공돈이 생기면 마가자 행을 할 거다. 그 후로 중국을 자원했고, 2014년부터 심양 신학교에 살고 있는데, 한때 교수 신부 8명 중 4명이 마가자 출신이었다. 그 신부들과 거의 매년 마가자를 갔었다. 순례라기보다 친구 집에 놀러 가듯 갔었다. 그러다 우연히 적봉의 신부를 만나게 되는데 역시 마가자 출신이라는 거였다. 놀라웠다. 교구 전체가 20명 남짓이라는데 마가자 사제가 10명인 것 같다. 앞으로 정말 기회가 된다면! 현 마가자 묘역 안의 염소 똥도 치우고, 담장을 새로 쌓고 싶다. 그 축복식 같을 날 번듯한 숙소라도 잡아, 출신 신부들과 못 먹는 나이주奶酒를 마시고 싶다. 그러다 헤어질 때 차비 봉투라도 건네고 싶다.
드넓은 초원과 시린 여름 하늘만 있어 마가자는 고향보다 더 고향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