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주교회사 : 베이징교구를 중심으로 - ② 교구 분할과 박해의 연속
베이징교구는 1696년에 산서(山西)와 섬서(陝西) 대목구가 분리된 이래 1831년에 조선(朝鮮) 대목구, 1838년에 요동(遼東) 대목구(1840년에 만주 대목구로 개칭됨), 1839년에 산동교구(山東敎區)를 분리하는 등 1940년대까지 70개에 이르는 교구와 지목구를 분할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1856년에는 베이징교구가 북직예(北直隸) 대목구 등 3개의 대목구로 분리되었다. 당시 베이징의 신자수는 약 17,000명이었다. 그리고 1946년 4월 11일의 교령에 의해 중국 교회의 교계 제도가 설정되면서 전국이 20개의 대교구 관구, 79개의 교구로 개편됨과 동시에 베이징 대목구는 베이징 관구를 관할하는 대교구로 승격되었다.
건륭제(乾隆帝, 재임 기간 : 1736~1795), 가경제(嘉慶帝, 재임 기간 : 1796~1820), 도광제(道光帝, 재임 기간 : 1821~1850)로 이어지는 박해 기간 동안 베이징교구장은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그러다가 1782년 12월 15일에는 다시 포르투갈 출신의 재속 사제로 프란치스코 제3회 회원인 구베아(Gouvea, 湯士選 알렉산델) 신부가 베이징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듬해 2월 12일에 인도의 고아에서 주교 성성식을 갖고 1785년 1월 18일 베이징에 부임하여 남당에 거처하였다.
1773년 7월 21일 예수회가 해산되면서 베이징교구는 큰 변화를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교황청에서는 1783년 12월 7일부터 이전에 예수회가 담당해 오던 전교 사업을 라자로회에서 인수받도록 하였으며, 프랑스 국왕이 그 권한을 위임받았다. 이에 따라 12월 17일에 프랑스 국왕과 포교성에 의해 중국 선교사로 임명된 라자리스트 로(N. J. Raux, 羅廣祥 혹은 羅旋閣) 신부와 길랭(Ghislain, 吉德明) 신부, 파리(Paris, 巴茂正) 수사가 1785년 4월 베이징에 도착하여 5월부터 북당에서 거처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북당에는 궁정에서 수학자로 활동하던 그라몽(J. J. de Grammont, 梁東材) 신부, 방타봉(de Ventavon) 신부 등 6명의 프랑스 예수회원들과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원으로 궁정 화가였던 판지(J. Panzi, 潘廷璋) 수사 등이 남아 있었다. 로 신부는 북당의 프랑스 선교 단장으로서 흠천감(欽天監) 부감(副監)일을 맡기도 하였는데, 1801년 11월에 로 신부가 사망한 뒤에는 길랭 신부가 선교 단장을 맡아 1812년까지 중국인 성직자 양성에 노력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1808년 7월 6일 사망하기까지 건륭제의 신임을 얻어 흠천감 감정(監正)과 국자감(國子監)의 산학관장(算學館長)을 역임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베이징 신학교를 설립하여 중국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데도 노력하였다. 그의 사망에 앞서 1804년 12월에는 포르투갈 출신의 라자리스트 수자 사라이바(Souza-Saraiva) 신부가 계승권을 가진 베이징교구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다. 당시 그는 마카오에 있었는데, 이후 구베아 주교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1805년에 재개된 박해 때문에 베이징에 부임하지 못하고 1818년 1월 6일에 사망하였다. 1811년에도 다시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먼저 서당 선교사들이 마카오로 추방되고 성당은 몰수되었다. 동당 선교사들은 1813년부터 감시를 받게 된 데다가 화재로 인해 성당을 제외한 건물이 전소되었으며, 결국 가경제의 성당 압류와 파괴로 선교사들이 모두 남당으로 이전해야만 하였다. 한편 북당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프랑스 라자리스트 라미오(Lamiot, 南彌德) 신부가 1819년에 마카오로 추방되면서 포르투갈 라자리스트 세라(Serra, 高守謙) 신부가 대신 북당을 관리하게 되었다.
수자 사라이바 주교가 사망한 뒤 베이징교구는 남당에 있던 포르투갈 라자리스트회의 리베이로 눈(Ribeiro Nunes) 신부가 총대리의 자격으로 교구를 관리하였다. 그러다가 리베이로 신부가 1826년에 사망하면서 남경교구장인 포르투갈 라자리스트 피레스 페레이라(Pirés-Pereira) 주교가 1838년까지 베이징교구를 아울러 관할하였다. 피레스 주교는 1806년에 이미 남경교구장에 임명되었으나 박해 때문에 그대로 베이징의 남당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결국 북당은 1826년에 세라 신부가 마카오로 떠나면서 일시 폐쇄되었고, 남당은 1838년 이후 한때 러시아 교회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후 중국 교회의 박해는 1842년 남경조약(南京條約)이 체결되고 문호가 개방되면서 완화되기 시작하였고, 1844년의 황포조약(黃埔條約)으로 신앙의 자유가 획득되면서 북당이 재건되었다. 이 무렵 베이징교구의 선교는 라자리스트회의 카스트로 무라(Castro e Moura) 신부 등이 담당하였는데, 특히 그는 포르투갈 출신으로 보호권을 유지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후 베이징교구는 1840년 초대 몽고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라자리스트회의 물리(Mouly) 주교가 1846년부터 관리를 맡게 되었고, 1856년에는 그가 북직예 대목구(즉 베이징 대목구)의 대목을 맡아 1868년까지 활동하였다. 당시 베이징 대목구의 신자수는 약 24,000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