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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쿠의 아침 저자 이태종 요한 신부] 소설 에필로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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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723회 작성일 19-04-11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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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쿠의 아침 저자 이태종 요한 신부] 소설 에필로그 1 

 

 

"어느 나라 사람인가요, 일본?”

장하(庄河)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교외로 나오자 에어컨을 끄고 회전 손잡이로 차창을 열던 택시기사가 나를 향해 물었다. 창밖 가로수 사이로 펼쳐진 논에는 벼 이파리가 여름 내내 짙어져 온 농음을 이제 연한 빛으로 풀어내며 이삭을 패고 있었다. 말복 직후부턴가 시원해진 바람이 벼 허리까지 쓸며 초록 이랑을 일으키다 휙휙 차 안으로 들어올 때는 불현듯 향수가 솟구쳤다.

조금도 낯설지 않은 이국의 들녘에 빠져있는 나에게 대답을 재촉하듯 기사는 뿔테안경을 룸미러에 들이댔다.


나 중국 사람이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에게 히죽 웃는 끝으로 한마디 했더니 발음이 서툰지 금방 눈치를 챈다.

아요, 한국 사람이군요. 한국 사람이 용화산은 왜 갑니까?”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질문일 만큼 그곳은 촌구석이다. 이럴 때는 어떻게 응할까 며칠 전부터 궁리하다가

옛날에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용화산에서 잠깐 사셨다는데 연로한 아버지께서 거기 사진이라도 찍어오라 해서요.”

라고 하기로 했다. 공연히 미주알고주알 다 이야기한다는 것은 중국인의 돈에 대한 집착을 모르는 짓이다. 어설피 굴었다간 혹시 이다음 외국인이 땅 몇 평 산다고 할 때에 땅값을 몇십 배로 부를지도 모른다. 이젠 중국 촌사람들도 이재에 밝다.

저기, 냇가 쪽으로 가서 내려주시오.”


용화산에 도착하자 나는 일부러 거기를 피하기로 했다. 몇 년 전부터 뭔 낌새라도 챘는지 낯선 사람에 대한 땅 주인의 비상한 관심이 느껴졌었다.


중국 요녕성장하시용화산진차쿠 성당 터.’


나를 다시 중국으로 이끌어 들인 곳이다.

칠 년 전에도 나는 중국 요녕성 심양시에 있었다. 2005년에서 2006년으로 넘어가는 연말연시, 한국에 있었으면 1231일 송년미사에다 11일 새해 천주의 모친 대축일로 눈코 뜰 새 없을 텐데 또 혼자 미사를 해야 되는구나. 그래, 밝아오는 새핼랑은 최양업 신부님이 보좌로 7개월 사목했다는 차쿠라는 곳에서나 맞아보자.’하며 무작정 길을 나섰다. 일주일째 방 안에 혼자였고 이런 막연한 출발이라도 하지 않으면 계속 그럴 판이었다. 방구석에서 혼자이나, 길바닥에서 혼자이나 피장파장이었다.


물론 차쿠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곳이고 한국교회사 권위자인 차 박사가 한 번 가보았거나 대충 지도로나 알 정도였다.

새벽에 출발한 길은 버스를 네 번이나 갈아타고 밤늦게야 장하까지만 도착했고, 용화산행은 이튿날 여관에서 11일 미사를 드리고 나서야 발을 뗄 수 있었다.


여보세요, 한국이지요 차 박사님, 이 요한 신부입니다. 찾았습니다. 용화산 여기래요. 문화대혁명 때 묻어버린 우물터, 부속 고아원 자리도 기억하고 있네요. 차쿠의 성모설지전 성당털 찾았어요!”


잘하지도 못하는 중국어로 물어물어 찾은 것도 아니고 혹시 동네에 천주교인이 있느냐고 그냥 행인한테 물었던 것이다. 아닌 밤에 홍두깨 같은 질문에도 대뜸 백 회장이라고 일러줬고, 이웃집에 놀러 가 있는 이를 불러내어 채취한 증언이었다.


이 신부님, 수고하셨습니다. 차쿠가 맞은 것 같아요. 거긴 유서 깊은 교우촌이니 역대 출신 신부님이 분명 계실 겁니다. 문화대혁명이 변수니 나중에 미국 차이나타운을 뒤져서라도 찾아야겠지요.”


국제통화를 하는 차 박사의 목소리도 흥분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기왕 거기까지 가셨으니... 백자점도 찾아보시면 좋겠습니다. 저도 차쿠에서 백 리 이내라는 것만 알고, 아직 누구도 모릅니다. 들어보셨지요, 요동 백가점이라고. 김대건 신부님 편지의 발신처!”


알다마다요, 네네, 기도 중에 만납시다,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당시 장하에서 수북한 눈길을 태워다 준 택시기사는 싹싹해 뵈는 앳된 총각이었다.


기사 총각, 이 근방에 백씨들이 모여 사는 백가점이 있다는데 여기 차쿠부터 반경 40킬로미터 내의 백가점이라는 곳은 모조리 갑시다. 며칠이라도 좋으니 이 잡듯 뒤지자고, 택시빌랑 걱정 말고.”


짐짓 각오가 되어있었다. 왜냐하면 나도 한국의 한 천주교 성지(聖旨) 태생이기 때문이다. 이제 백가점을 찾는다면 내가 최초가 될 것이라는 생각보다 앞서는 것은 어릴 때 낯선 어른들까지 몰려와 무명 순교묘역 발굴이라며 백 년이 넘었다는 석은 묵주와 세례명이 적힌 사기조각을 꺼낼 때의 그 감개였다.


방금 백가점이라고 하셨어요 조 앞인데요.”


택시 총각은 마치 장난하지 말라는 투로 냇가 건넛마을을 가리켰던 것이다.. 자기가 여기 출신으로 장하에 나가 운수업을 해서 빠삭한데 근방에 백가점이란 동네는 개울 건너밖에 없다고 했다. 두세 번 돌 던지면 닿을 거리가 김대건 신부님의 백가점(白家店)이요, 좀 전 취재했던 백 회장의 성이 그 백씨라는 거였다. 하기는 백 회장의 어머니가 두()씨라고 했다. 그렇다면 김대건 신부님의 서한에 나오는 두 회장의 자손이 아닌가!


최초로 백가점을 발견한 것보다 더한 탄성이 김대건 신부님의 백가점과 최양업 신부님의 차쿠가 완전 동일지점이라는 데서 터지고 있었다.


그로부터 4개월 후, 차 박사는 교회 책임자 어른과 직관계자 몇 분을 모시고 정식으로 해외답사를 나왔다. 그리고 대만까지 날아가 문화대혁명 시절 타이베이로 피신한 차쿠 출신의 노사제에게 결정적 고증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용화산이 차쿠 성당이고 차쿠의 옛이름은 바로 백가점이라 불렸었다고. 지금 생각해도 7년 전의 일은 너무 술술 풀린 일이었다.

긴 여름날도 어둑해지기 시작한다.


마침 금일 야간조니 밤 몇 시라도 전화하면 다시 오겠노라는 인사말로 뿔테안경과 헤어지고는 곧장 냇가로 내려가 그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칠 년 망에 다시 앉은 바위. ‘안정된 본당신부 생활을 마다하고 또 대책 없이 나를 중국으로 끌어들인 차쿠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4년 전, 3년 동안의 중국생활을 접고 한국에 돌아가 본당을 맡았던 첫 주일, 마침 순교자 성월이 시작되어 한국교회사 관련 강론을 했던 날이었다.


따르릉, 11시가 넘어가는 사제관에 웬 여교우의 수화기 음성이 들려온 것이다. 어차피 신임이니 익명성을 보장받고 있다는 듯 그려는 조금도 거침이 없어 보였다.


신부님, 강론을 잘 들었는데그런데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이 사이가 좋았습니까?”

누구신지, 새로 부임해서우리 본당 신자시겠지요?”

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뉘신지 알아야 제대로 답변해 드릴 텐데요.”

죄송합니다, 신부님. 궁금해서 잠이 안 와서요.”

세상에 둘도 없는, 죽고 못 사는 사이셨습니다.”

글쎄요. 세상이 그러도록 놔두지 않았을 텐데요, 최 신부님은 4년이나 서품이 늦어졌는데.”


한국천주교회사 쪽으로 보통이 넘는 신자였다.


무조건 미화할 생각은 없어요. 찾아볼수록 그런 내용입디다.”


전화 끝에 나도 잠이 오질 않았었다. 두 신부님의 우정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여기 백가점이자 차쿠인 용화산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새 임지에서 맞이한 첫 주일부터 차쿠는 그렇게 나를 불러댔던 것이다.


어 저건 뭐지, 반딧불이 아니야?”


어둑어둑해져 가는 밤 냇가에서 혼자 소리를 내고 말았다. 반딧불이였다. 여기 용화산 앞 냇가에서도 한국과 똑같은 반딧불이가 반작이고 있었다. 참 살다 보면 우연들이 이렇게 우연히 겹칠 때가 있네, 싶다. 사실 인사이동을 받은 작년 20118월 말, 즉시 중국으로 출국하려 했다. 그런데 책임자 되시는 분의 말씀이 추석도 다가오고 하니 출국 전 본가에서 명절이나 지내라고 하셨다. 덕분에 내가 태어난 공소에 갔던 작년 추석을 휴대폰으로 찾아보니 912일이다. 추석 후에도 한 주간을 더 지냈으니 9월하고도 중순이 훌쩍 넘었을 것이다. 저녁식사 후 할 일도 없어 산보나 하려고 나선 것이 공소 방향이었다. 이미 칠흑같이 어두워진 공소는 별로 바뀐 것도 없이 예나 지금이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혹시나 싶어 지그시 밀어보니 항시 문을 잠가놓고 다닌다는 말이 무색하게 삐걱 열리는 것이다. 나는 공소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40년 전에도 종종 그랬을 유년 시절을 지켜보는 재미에 불도 켜지 않은 채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중국에 가서 어떤 일을 맞게 되더라도 지켜주십시오, 라는 소리도 했던 것 같다.


신앙의 잔뼈가 굵은 곳이다. 캄캄한 어둠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마당이라도 한 바퀴 둘러보려 막 공소 문을 닫고 나왔을 때였다. 공소에서는 벌써 30여 년 전부터 20미터 떨어진 종각과의 사이에 유해 두 구를 이장해 놨는데 역시 순교자였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나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기척에 놀랐는지 돌연 반딧불이 두 마리가 순교자 묘에서 반짝반짝 날아올라 종각을 돌며 몇 번을 오르내리더니 유유히 산 쪽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아니 추석도 지났는데 무슨 반딧불이야 작년까지만 해도 어릴 적 여름방학의 추억 속에서만 남아서였을까, 반딧불이는 한여름내기 곤충인 줄로만 알았다.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공소에 문이 열렸더라는 말씀만 드리고 반딧불이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내가 중국에 가는 것처럼, 어떤 성과도 어떤 계획도 섣불리 이야기할 수 없는 것처럼 반딧불이 건도 일체 마음에만 간직하고 싶었다.


그렇지, 여기 용화산의 반딧불이라면.”


아무도 없는 이국(異國)의 냇가에서 자꾸 혼자 중얼거리게 되는 것이 용화산은 얼마 전까지 차쿠라 불렸고, 차쿠 이전에는 백가점이라 불렸던 곳이니.


그러면, 옛날 백가점의 그 반딧불이네!”


꼭 같은 여름밤, 꼭 같은 장소의 반딧불이인 셈이었다.

나는 갑자기 반딧불이가 점점 작아지는 밤하늘 끝으로 완전히 몰입되었다. 가물가물 그러다 아예 없어져 버린다. 그러기를 한참 만에, 사라졌던 반딧불이가 다시 반짝거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깜박깜박 점점 선명하게, 그러다 풀숲 사이로 눈을 이끄는데 하늘로 올라갔다 내려오고부터는 왠지 현재가 아니라 167년 전 김대건 신부님이 사제서품을 목전에 둔 그 여름의 반딧불이만 같다. 쫓아가는 내 눈까지 시간 이동시켜줄 것만 같다.


나는 이국의 냇가에서 밤을 새워도 좋으니 반딧불이가 타임머신의 지시등처럼 깜박이며 데려다 주는 과거의 시간 속에 푹 빠져보기로 했다.


두런두런 꼭 지금 같은 저녁나절, 풀숲을 헤치며 걸어오는 두 남자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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