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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련 안중근(토마스) 여순 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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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488회 작성일 19-04-02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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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련 안중근 여순 감옥 / 독립 운동사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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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감옥과 안중근 토마스 의사

 

1. 여순 감옥

안중근 의사가 교수형을 당하기 직전까지 수감되어 있었고,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이 6년여의 옥살이(1929. 51936. 2) 끝에 순국한 장소. 1894년의 청일전쟁 일본이 요동을 점령하자, 러시아가 3국간섭(三國干涉) 통해 일본을 요동에서 축출하고 요동 지방을 조차한 1902년에 건축하기 시작했으며, 1904년의 러일전쟁 이후 여순을 점령한 일본군이 확대 시공하여 1907년에 완공함.

 

2. 안중근 의사 연보


1879년 7월 16일(양력 9월 2일) : 황해도 해주에서 안태훈과 조조이의 31 장남으로 출생(배와 가슴에 북두칠성 모양의 7 흑점이 있어 아명이 應七)


1885년(7세) : 안 의사 일가 신천군 청계동 이주

안중근 : 집안의 학통을 이음. 청계동 한문학교 수학 → 동시에

상무 정신(무예 병법) 개화 사상 함양


1894년(16세) : 안 의사, 김아려와 결혼(2남 1녀 : 딸 현생, 아들 분도, 후생)


1895년 여름 : 부친 안태훈이 동학 농민군 토벌시의 군량미 문제로 추궁을 받자 명동 대성당으로 피신


1896년 10월 : 안태훈이 선교사들로부터 천주교 서적을 얻고, 교리에 밝은 이종래(바오로) 함께 청계동으로 귀환


1897년 1월 11일 : 안악의 마렴 본당(안악군 文山面)에 있던 빌렘(Joseph Wilhelm, 洪錫九) 신부가 청계동 방문

안태훈(베드로), 안중근(토마스, 18), 안태건(가밀로) 등 33명 세례


1897년 12월 : 안중근, 청계동 방문 후 해주로 가는 제8대 조선 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아우구스티노) 주교 안내


1898년 4월 하순 : 빌렘 신부, 본당을 마렴에서 매화동으로, 다시 청계동으로 이전, 안 의사는 이후 빌렘 신부의 복사로 전교 활동


1900년경 : 안 의사, 빌렘 신부와 함께 뮈텔 주교를 찾아가 대학 설립을 건의(프랑스어 공부 중단)


1906년 3월 : 상해에서 르각(Le Gac, 郭元良) 신부를 만나고 귀국 한 뒤 남포(즉 鎭南浦) 이주 → 교육 사업, 식산 운동, 결사 운동, 國債報償運動


1907년 10월경 : 북간도 망명 후 애국 계몽 운동 및 무장 투쟁. 이윤범(李範允) 의병 부대의 참모중장으로 활동


1908년 6월 : 안 의사 300여 명의 의병 부대를 거느리고 국내 진입 작전

 

의사 : 일본군을 피해 도망가는 동안 함께한 2명의 의병에게 대세를 줌

“두 형은 내 말을 믿고 들으시오. 세상 사람이 만일 천지간의 큰 임금이요 큰 아버지인 천주님을 신봉하지 않으면 금수만도 못한 것이오. 더구나 오늘 우리들은 죽을 지경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속히 천주 예수의 진리를 믿어 영혼의 영생을 얻는 것이 어떻소. 옛 글에도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하였소. 형들은 속히 전날의 허물을 회개하고 천주님을 믿어 영생의 구원을 받는 것이 어떻소” 하고는 천주가 만물을 창조하여 만드신 도리와 지극히 공번되고 지극히 의롭고, 선악을 상벌하는 도리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내려오셔서 救贖하는 도리를 낱낱이 권면하였더니, 두 사람이 다 들은 뒤에 천주교를 믿겠노라고 하므로, 곧 교회의 규칙대로 代洗를 주고 예를 마쳤다("안응칠 역사", 167쪽.)

 

1909년(31세) 2월 7일경(양력 3월 5일경) : 단지 동맹을 통해

‘동의단지회’ 조직(현 단지 동맹비가 서 있는 러시아 크라스

키노시의 주카노브 마을 인근에 있던 연추 하리마을)


1909년 3월 21일 : 하얼빈 의거 결의. 이후 용정훈춘 등지에서

독립의 중요성을 역설


1909년 10월 21일 아침 : 연춘 하리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안중근우덕순이 블라디보스톡의 기차역을 떠나

쑤이펀허를 거쳐 하얼빈으로 향발(통역자 유동하 동행).


1909년 10월 22일 : 하얼빈 도착


1909년 10월 25일 : 안 의사, 거사의 한 지점인 채가구를 우덕순,

조도선 등에게 맡기고, 자신은 다른 의거지 하얼빈으로

돌아옴(탄환에 십자를 표시함)


1909년 10월 26일(음력 9월 13일) : 안 의사, 조선 통감 이토오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 응징(7연발 브라우닝 권총에 약실 포함하여 모두 8발을 장전, 7 사격에 3 명중), 수행원 

하얼빈 천상 총영사, 비서관, 전중 만철 이사 부상

러시아 헌병에 의해 체포된 후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3 외침 오후 89시경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짐

 

안중근 토마스 : 거사 후 聖像이 있는 벽을 향해 십자 성호를 그으며 조국에 대한 의무를 다했습니다. 저를 도와주신 하느님께 예배를 드립니다.”라고 하였으며, “이등박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신에게 감사하면서 십자가를 긋고 대한만세를 불렀다.”

 

1909년 10월 30일 : 안 의사, 관련 연루자와 함께 일제의 여순 관동

도독부로 이송 시작


1909년 11월 3일 : 일본과 러시아 헌병의 감시 아래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정대호, 김성옥 등과 함께 여순구 감옥 수감


1909년 12월 중순 : 동생 정근, 공근이 여순 감옥으로 면회. 자서전

<안응칠 역사> 집필 시작


1910년 12월 : 여순 관동도독부 고등법원 제1호 법정에서 공판


1910년 2월 14일 : 제6회 공판(최종 판결) 개정. ‘안중근 사형’선고


1910년 3월 8일 : 빌렘 신부, 여순 감옥으로 안 의사 방문

(고해성사, 성체성사)


1910년 3월 26일(음력 2월 16일) : 교수형으로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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