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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자(馬架子) : 조선대목구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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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1,324회 작성일 19-03-25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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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자(馬架子) : 조선대목구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선종 


사적지현소재지대표적인 사료역사적 의의
마가자내몽고 적봉시 동산향조선 초대교구장 
소주교(발트 로메오 브르기에르)의 서한,일기
북만주 '뺄리꾸' 교우촌이라 일컬어 졌던 이곳은 
대룩을 횡단하던 선교사들의 오아시스 같았던 곳, 
1835년10월경 소주교는 
부근에서 사망한 후 이곳에 안장. 
지금은 적봉교구 소속 사제 2~3명이 성무 집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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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교우촌인 마가자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입국을 눈앞에 두고 1835년 10월 20일에 병사한 곳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조선 입국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선교 거점이었다. 이곳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3년여 중국 대륙을 횡단한 끝에 마침내 조선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기착지로 생각했던 곳이다. 12월말 압록강이 얼어붙으면 변문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가기로 이미 조선 교우들과 약속까지 했으나  서만자에서 마가자까지 길을 병약한 몸으로 달려와서 도착한 다음날 저녁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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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인 브뤼기에르 주교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로부터 1831년 조선교구 설정과 함께 초대 교구장 주교로 임명된 후 중국 내륙을 거쳐 조선 땅으로 부임하던 중 1835년 병사했다. 조선 땅을 눈앞에 두고 마가자(馬架子, 지금의 적봉시 송산구 ‘동산’), 즉 펠리구(Pie-li-keou)라고 불리는 서부 달단(지금의 중국 내몽고 지역)의 한 교우촌에서 눈을 감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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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기에르 주교로부터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모방(1803~1839, 성인) 신부가 장례미사 후 고인의 유해를 마가자 현지에 안장했고, 묘소 앞에 묘비를 세웠다. 이후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는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서울 용산 성직자 묘역에 이장됐다. 묘비는 마가자 현지에 그대로 방치돼 있다가 1960년대 후반 중국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이 서양과 관련된 것들을 파괴하는 와중에 사라진 것으로만 알려졌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묘비는 마가자 천주당 정문을 나와 오른쪽으로 성당을 감싸고 돌아가면 5분 거리에 바로 성직자 묘지에 있다.  묘지를 둘러싼 벽돌담도 인상적이었는데 개포동 본당 신부님이 지원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기적적으로 자리에 돌아온 묘지석은 문화혁명 때 파괴되어 누군가의 섬돌이 되어 짓밟혔던 것을 고인이 숨을 거둔 중국 내몽골자치구에서 170년만에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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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송산구 동산향의 동산 천주당 리진타오(李金濤) 보좌 신부는 1월 초 인근 마을의 교우들을 순방하던 도중 그곳 교우들로부터 제보를 받고 중국 문화혁명 때 파괴된 것으로 알려진 브뤼기에르 주교의 묘비를 찾아냈다. 1월 초 성당에서 20리(약 8km) 떨어진 교우촌을 방문하던 중 교우들이 '문화혁명때 외국인 선교사가 묘비가 파괴될 것을 염려해 옮겨 놓은 것'이라며 비석을 내줘 성당으로 옮겨다 놓았다"고 발견 경위를 밝혔다. 이 신부는 또 "당시 서양 선교사는 홍위병에 의해 살해돼 순교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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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는 브뤼기에르 주교와 함께 중국에서 조선선교에 나섰던 모방(1803-1839) 신부가 1835년 브뤼기에르 주교의 시신을 안장하고 묘소 앞에 세운 것이다. 묘비에는 '首鐸 蘇公之墓 道光十五年八月二十九日立(수탁 소공지묘 도광 십오년 팔월이십구일립)'라고 쓰여있는데, 수탁(首鐸)은 초대 조선교구장을, 소공지묘(蘇公之墓)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무덤'을 뜻한다. 모방 신부는 1835년 11월 서한에서 '주교님의 무덤 위에는 주교님의 한자 성(姓)인 소(蘇)자가 새겨진 묘비가 세워졌다'고 적었다. 또한 도광(道光)은 청(淸)나라 선종(宣宗)의 연호로, 도광 15년은 곧 1835년이다. 따라서 묘비는 브뤼기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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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의 선종일인 음력 1835년 8월29일(양력 10월20일)에 묘비가 세워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善終)한 때와 일치한다.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세 소년이 조선을 빠져나와 마카오로 어떻게 갔을 지 관심을 가졌는데 결국은 브뤼기에르 주교님이 조선으로 가셨던 길의 역방향의 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방 신부가 뽑아 보냈던 세 소년에게 마가자에서 조선을 그리워하며 돌아가신 브뤼기에르 주교님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모방 신부님은 주교님이 돌아가시자마자 마가자로 오셔서 장례미사를 집전했고 바로 그 묘지에 주교님을 장례 지내셨던 바로 그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세 소년은 결국 마가자로 왔을 것이고 주교님 무덤 앞에 무릎 꿇어 결국은 조선교우를 위한 순교를 다짐했을 것이다. 마가자는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죽음으로 인해 모방신부- 김대건·최양업으로 이어지는 주춧돌을 놓은 그야말로 위대한 성지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곳에 묻혔던 소 주교 유해는 1931년에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서울 용산 성직자 묘역으로 이장됐다.

 

[주] 펠리구

마가자(동산)의 옛 프랑스어 표기. 한자어로는 별용구(別龍溝)라 표기하며, 그곳 사람들은 이를 비에롱고우(Bie-long-gou)라고 발음한다. 이 지역에는 동별용구와 서별용구(Sie-bie-long-gou)가 있는데, 마가자는 후자를 말한다.  


 

■  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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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자를 가기전 두 시간 거리인 적봉(赤峰)은 내몽고 자치구의 직할시다. 이곳은 내몽고의 가죽, 우유, 고기의 집산지라고 한다. 게다가 한국에 많은 피해를 주는 황사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1년에 거의 160일간 황사바람이 몰아치는 곳이다. 적봉주교좌성당이 있는 적봉교구는 1932년에 설립되었다. 1949년 중국 공산정권이 설립되었는데 그 전까지 본당이  52개나 있을 정도로 적지 않은 규모였다.  

 


■  브뤼기에르 주교

1792년  2 12 프랑스 남부 나르본 레싹 출생

1815년 12월 23일 사제서품

1825년  9 17 파리외방전교 입회

1826년  2월  5 ( 태국) 선교사로 임명, 파리 출발

1829년  6 29 주교 성성식(방콕)

1831년  9월  9 조선교구 설정 초대 교구장 서임

1832년 10월 18일 중국 남부 마카오 도착

1833년 10월 10일 산서 교구의 장치 도착

1834년 10월  8 하북성 서만자 교우촌 도착

1835년 10월 19일 내몽고 마가자 교우촌 도착

1835년 10월 20일 선종(43세)

 


아래 지도는 2010년 8월 23일부터 29일까지의 순례도이다. 장가구에서 적봉까지 보통 12시간 내외가 걸리는데 도로공사로 두군데서 우회 도로로 17시간 걸려 적봉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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赤峰敎區廳 : 內蒙古 赤峰市 紅山區 二東街 天主堂 88號

馬架子 聖堂 : 內蒙古 赤峰市 松山區 大夫營子鄕 東山 天主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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