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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사와 연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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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583회 작성일 19-04-12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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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사와 연행로

 

1. 연행사


조선 전기에는 명나라에 보내는 사신을 조천사’(朝天使)라 했으나, 조선 후기에는 청나라의 도읍인 연경(燕京, 北京)에 간 사신이란 의미로 연행사’(燕行使)라 했다.


청의 도읍이 선양이던 시기(1637~1644)에는 매년 4회씩 정기적으로 연행사를 보냈으나, 입관 이후인 1645(인조 23)부터는 모두 동지사에 통합되어 연 1회의 정기 사행으로 단일화되었다. 그러나 부정기적인 임시 사행이 자주 파견되었다.

사행의 임무는 매우 복잡하였다. 모든 사행은 반드시 표문(表文 : 왕복 외교 문서)이나 자문(咨文 : 일정한 청원을 담아 올리는 글) 등 사대 문서와 조공품을 가지고 가서 조공과 회사(回謝) 형태로 이루어지는 연행 무역을 하였다.


사행원의 구성과 인원은 사행의 종류에 따라서 다르다. 대부분의 사행은 사(使) 2(正使副使), 서장관(書狀官) 1, 대통관(大通官) 3, 압물관(押物官) 24인으로 합계 30인이 원칙이었고, 각 정관의 수행원을 합치면 일행의 총인원은 200인에서 300인 내외가 되었다. 정사와 부사는 정3품 이상의 종반(宗班)이나 관리 중에서 선발하였고, 서장관은 4품에서 6품 사이에서 선발하였다. 정사부사서장관을 삼사’(三使)라고 칭했다. 특히 서장관은 사행 기간 중에 매일의 기록을 맡았고, 귀국 후에는 국왕에게 보고들은 것을 보고할 의무를 지녔으며, 일행을 감찰하며 도강(渡江)할 때는 인원과 짐을 점검하였다. 삼사 이외의 정관은 대부분 사역원(司譯院)의 관리로 임명하였다.


사행은 모든 경비를 현물로 지급받았으며, 사행 도중의 국내에서의 지공(支供 : 음식을 제공함)은 연로의 각 지방에서 부담하였다. 그러나 세폐와 공물, 사무역을 위한 물품, 식량사료 등 많은 짐을 휴대했으며, 많을 경우는 350()를 초과하기도 했다. 명대에는 사행로가 해로와 육로가 있었으나, 청대에는 육로만을 이용했는데, 육로는 명대와 큰 차이가 없었다. 연행사의 육로 거리는 총 3,100리의 거리며 40일의 여정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5060일이 걸렸고, 북경에서의 체류 기일을 합치면 통상 5개월 내외가 소요되었다.


사행은 의주에 이르러 압록강을 건너기에 앞서 정관 이하 인원마필세폐노비(路費)기타 적재물을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이것을 도강장’(渡江狀)이라 한다. 그리고 중국 측의 책문(柵門)에 도착했을 때는 그와 같은 사항을 중국 측의 지방관에게도 보고하였다. 이것을 책문보단’(柵門報單)이라 한다. 그 뒤 사행이 심양에 도착하면 방물의 일부를 요동 도사(遼東都司)에게 전달했고, 요동 도사는 이 내용을 황제에게 보고하는 동시에 물품을 북경에 전송하였다.


사행이 북경의 숙소인 회동관(會同館)에 도착하면 청의 역관이 이들을 영접하였다. 중국에서의 연로와 회동관의 공궤(供饋 : 음식을 공급함)는 모두 청의 광록시(光祿寺)가 부담하였다. 북경에 도착한 다음 날 예부(禮部)에 표문과 자문를 전달하며, 청의 황제를 알현하는 조하(朝賀) 때에는 여러 차례 연습을 한 뒤 매우 복잡한 의식을 행하였다. 가지고 간 세폐와 방물은 예부로 보냈고, 예부에서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예부에서는 도착 후 하마연(下馬宴)을 베풀었고, 귀환에 앞서서는 상마연(上馬宴)을 열어 주었다. 황제는 국왕에 대한 회사를 비롯해 사행의 정관 전원과 수행원 30인에게 하사품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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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이 귀국하면 삼사는 국왕을 알현하고, 서장관은 사행 중에 보 고 들은 문견록(聞見錄)을 작성해 국왕에게 보고했다. 한 사행의 정사 이하 정관이나 수행원들도 사행의 기록을 사적으로 작성하기도 했다. 1637(인조 15)부터 1894(고종 31)까지 조선에서 청에 간 연행사는 총 507회이며, 같은 시기 청에서 조선에 파견한 대조선사행인 칙사(勅使)169회였다.



 

2. 연행로

육로 : 한양 - 의주 - 압록강 - 심양 -산해관 - 북경

해로 : 선천(宣川) 선사포(宣沙浦) - 서해 - 산동 등주(登州) - 북경

연행로 중 동팔참(東八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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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 : 1637(인조 15) 28일 부왕 하직(당시 청의 장수는 구왕 : 태종 홍타이지의 아홉째 동생), 4월 심양 도착, 16401644년에 일시 귀국한 적이 있음, 1645218일 귀국 서울 도착, 426일 학질(말라리아)로 급서 / 세자빈 강 씨(姜氏) : 영리하고 경제에 밝아 심관(瀋館, 심양아동도서관 자리?)의 살림살이를 주도함. 16461월 인조의 전복구이 독약 사건으로 강빈의 형제들이 먼저 장살되고 315일에는 강빈이 賜死.


봉림대군(효종) : 18세 때인 1837년에 청석령을 넘다(過靑石嶺)

청석령 지났구나 초하구(草河衢) 어디메뇨(靑石嶺已過兮 草河溝何處是) / 오랑캐 바람은 차기도 참데 궂은비는 무슨 일인고(胡風凄復冷兮 陰雨亦何事) / 뉘라서 내 행색(行色)을 그려 임(임금) 계신 데로 전할 것인가(誰畵此形像兮 獻之金殿裡)”<김천택의 청구영언 ; 김수장의 해동가요>


박지원 : 1780. 연산관을 거쳐 마운령청석령낭자산을 지난 뒤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 중 요동새벽길遼野曉行>  

너른 요동벌 언제나 끝나려나(遼野何時盡) / 열흘을 가도 산 하나 볼 수가 없네(一旬不見山) / 샛별은 말머리에서 반짝이는데(曉星飛馬首) / 아침해가 밭이랑 사이에서 떠오르네(朝日出田間)”


<도강록 중 호곡장론好哭場論>  

산기슭에 가려서 백탑(白塔)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재빨리 말을 채찍질해 수십 보()를 가지 않아 막 산기슭을 벗어났는데…… 말을 세우고 사방을 둘러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대고 한바탕 울 만한 곳이로구나! 가히 한 바탕 울 만한 곳이야!’(好哭場 可以哭矣)라고 말했다.”



차기진 : 201229<압록강에서 산해관까지 3천리 여정을 가다 중 도산해관到山海關’>

 

끝없는 지평선, 붉게 노을지는 하늘

혹독한 추위, 얼어붙은 요동벌

영원한 목자의 길을 가는 소년들은 순교자의 용덕을 닮고, 영겁의 본향 앞에 찰나의 세상은 머리를 조아린다.

모방 신부와 정하상 바오로, 샤스탕 신부와 최양업 토마스

만리장성의 허물어진 성벽, 굳게 닫힌 의주 성문

그 길을 가는 순례자들은 열다섯 살 소년들의 벗이 되고, 신앙의 눈은 황량한 대지 너머로 내일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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