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차쿠자료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입국과 순교

페이지 정보

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389회 작성일 19-04-12 23:18

본문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입국과 순교

 

1. 프랑스 선교사들의 입국


18351020일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B. Bruguière, 바르톨로메오 : 17921835) 주교가 마찌아즈(馬架子) 교우촌에서 선종한 뒤 모방(P. Maubant, 베드로) 신부는 길을 재촉하여 국경으로 갔고, 그곳에서 조선의 밀사들을 만나 1836113(음력 18351125) 마침내 조선에 입국하였다. 조선에 입국한 첫 번째 프랑스 선교사가 된 것이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선종 전에 조선대목구를 위해 몇 가지 조치를 취했는데, 그의 혜안과 선견지명은 훗날 큰 효력을 발휘하였다.


첫째, 1834920일자로 포교성성에 서한을 보내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랴오퉁 지역을 베이징교구에서 분리하여 조선대목구에 예속시키거나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이 지역은 1838랴오퉁 대목구’(1840년 만주 대목구로 개칭)로 설정되고, 파리외방전교회의 베롤 주교가 대목구장에 임명되었다.

 

둘째,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는 다른 방법으로 일본을 파리외방전교회에 추천하였고, 전교회 본부에서는 포교성성에 류우쿠(琉球) 지역의 사목을 위임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그 결과 그레고리오 16세는 1836426일 류우쿠의 사목을 조선대목구장에게 위임하게 된다.


셋째, 브뤼기에르 주교는 산서성 타이위안을 떠나기 전에, 그리고 시완쯔에 도착한 뒤 쓰촨성의 모핑(현 사천성 雅安市 寶興縣) 신학교에서 활동하고 있던 성 앵베르(L. Imbert, 范世亨) 신부를 자신의 후계자로 포교성성과 파리외방전교회에 거듭 추천하였다. 그 결과 앵베르 신부는 1836426일 계승권을 가진 조선대목구의 부주교로 임명되고, 1837514일 주교 서품식을 갖고 제2대 조선대목구장이 되었다.


넷째, 브뤼기에르 주교는 시완쯔를 출발하기 전에 조선 선교에 대한 모든 권한을 모방 신부에게 위임하였다. 그 결과 총대리 모방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면서 포교성성 추기경 회의에서 붙였던 단서 조항들, 즉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한 이후 조선 교회가 비로소 독립된 대목구로 설정된다는 조항,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체류가 완전히 보장될 때 비로소 조선 교회가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된다는 조항들이 유효해지면서 파리외방전교회의 사목권이 분명해지게 되었다.

 

조선에 입국한 모방 신부는 조선어를 배우면서 브뤼기에르 주교에게서 받은 권한을 가지고 열심히 성무를 집행하였다. 그리고 정하상(바오로)유진길(아우구스티노) 등 지도층 신자들이 선발해 놓은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안드레아) 소년의 집안과 신앙을 살펴본 다음 이들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였다. 그리고 서울로 이들을 불러 올려 라틴어를 가르친 후 1836122일 서약을 받고 이튿날 마카오로 출발토록 하였다.

123일 최양업최방제김대건 신학생은 중국으로 돌아가는 유방제 신부와 밀사 정하상조신철이광렬 등과 함께 국경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18361228일 중국 국경 지대에서 샤스탕(J. Chastan, 야고보) 성인 신부를 만난 뒤 마찌아즈 교우촌과 시완쯔 신학교를 거쳐 마카오로 향하였고, 샤스탕 신부는 그들과 헤어져 18361231(음력 18361124)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리고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도 그 뒤를 이어 18371218(음력 1121)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의 사목 활동은 오래 가지 않았다.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로 인해 921(814) 군문효수의 판결을 받고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박해로 정하상 등 지도층 신자들은 물론 최양업 신학생의 부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성인, 김대건 신학생의 부친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성인도 모두 순교하게 된다. 최양업과 김대건 신학생이 이 박해 소식을 듣게 된 것은 그로부터 3년 여가 흐른 뒤였다.

 

 

 

2.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 연보


 

앵베르 주교

 

1796년 액상프로방스 까브리에(Cabriès)의 마리냔(Marignane) 본당 브리카르(Bricart) 에서 탄생

1818108일 액스(Aix) 교구의 대신학교를 거쳐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

18191218일 사제 서품 후 중국 사천 선교사로 임명되어 18203월 파리를 출발

1821319일 페낭 도착 후 신학교 교수, 싱가포르 선교사 역임 후 1822년 마카오 도착, 사천으로 가는 길이 막히자 코친차이나와 통킹에서 2년 동안 사목하다가 18253월 쓰촨성 도착

1836426일 조선대목구의 부주교로 임명되고, 1837514일 주교 서품

18371218일 조선 입국 후 서울과 인근 경기도 지역에서 사목. 정하상(바오로) 3(이문우 요한, 이재의 토마스, 최형 베드로로 추정됨)의 신학생 선발

1838121성모 마리아를 조선교구의 주보로 선정한 뒤 교황청에 허락 요청(1841822일 그레고리오 16세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성 요셉과 함께 조선 주보로 승인)

1839년의 기해박해 발생 후 순교자들의 행적 수집(훗날의 "기해일기")


 

 

모방 신부

 

1803년 프랑스 칼바도스의 바시(Vassy)에서 탄생

1829613일 바이외(Bayeux) 대신학교 졸업 후 사제 서품, 고향 본당에서 보좌 신부

18311118일 파리외방전교회 입회

183235일 중국 쓰촨(四川) 교구 선교사로 임명되어 파리 출발, 911일 마카오 도착

183339일 프젠성 푸간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조선 선교 자원

18347월 베이징을 거쳐 허베이성 시완쯔에 도착한 다음 브뤼기에르 주교와 상봉

1836113일 프랑스 선교사 최초로 조선에 입국. 43일 부활대축일 미사

- 교우촌 순방, 신학생 선발, 유방제(파치피코) 신부를 귀국시킴

- 샤스탕 신부 입국 후 경기도 북동부와 충청북도에서 사목


 

샤스탕 신부

 

1803년 프랑스 디뉴(Digne)의 마르쿠(Marcoux)에서 탄생

18261211일 디뉴 대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사제 서품. 다음해 16일 가족 이별

1827113일 파리외방전교회 입회 후 샴 선교사로 임명되어 422일 파리 출발

1828710일 코친차이나 도착, 719일 마카오 도착 후 페낭 신학교 교수로 임명됨

1832년 페낭 신학교 교수 재임 중 조선 선교사 자원

18335월 페낭 출발 마카오 도착. 11월 푸젠성의 푸간 도착, 베이징을 거쳐 1834년 산둥으로 가서 사목

18361231일 조선 입국. 조선어를 배운 뒤 경기도 남서부와 충청남도 및 경상도 등지에서 사목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