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최양업 신부



 
 

bc831a2241b13068fa79767717807af7_1553659989_4115.jpg

 


崔良业简历 

 

1821          3  1日,  在韩国忠清道 出生。

1837(16)  6  7日,  来到澳门留学。(读哲学)。

1842(21) 10 25日,  到庄河蓉花山白家店。

1844(23)                     在长春八家子升执事。

1847(26)  8 26日,  在上海徐家汇神学院读书(神学)。

1849          4  15日,   在上海张家杵臼天主教以韩国第二神父,升神父。

1849(28)                     来到庄河市蓉花山镇天主教常工作。

1861(40)  6 15日,  回韩国后1人十多年来很辛苦地工作中在路上累死了。

2016         4  26日,    以可敬者Venerable宣布。(韩国第一作证的可敬者。 <더보기>




 



 
 

bc831a2241b13068fa79767717807af7_1553659989_4115.jpg

 


崔良业简历 

 

1821          3  1日,  在韩国忠清道 出生。

1837(16)  6  7日,  来到澳门留学。(读哲学)。

1842(21) 10 25日,  到庄河蓉花山白家店。

1844(23)                     在长春八家子升执事。

1847(26)  8 26日,  在上海徐家汇神学院读书(神学)。

1849          4  15日,   在上海张家杵臼天主教以韩国第二神父,升神父。

1849(28)                     来到庄河市蓉花山镇天主教常工作。

1861(40)  6 15日,  回韩国后1人十多年来很辛苦地工作中在路上累死了。

2016         4  26日,    以可敬者Venerable宣布。(韩国第一作证的可敬者。 <더보기>




 

최양업 신부의 편지 : 15-16번 째 (오두재에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373회 작성일 19-03-29 14:20

본문

● 최양업 신부의 열다섯 번째 편지 
발신일 : 1858년 10월 3일
발신지 : 오두재
수신인 : 르그레주아 신부

예수 마리마 요셉,
파리 외방선교회 신학교 학장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공경하올 신부님,
지난 2년 동안에는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께서 즐거운 소식만을 신부님에게 전하게 허락하셨는데 금년에는 매우 슬픈 소식을 주셔서 이것을 신부님께 전해드립니다. 이것도 역시 언제나 지극히 좋으시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만사에 항상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섭리에 온전히 복종시켜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때에는 근심하는 당신의 종들을 자상하게 위로도 해주시고, 또 어떤 때에는 슬픔으로 단련시켜 우리를 지혜롭게 겸손해지도록 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베르뇌 장 주교님과 두 분 선교사들의 입국으로 기쁨에 도취되어, 페레올 주교님과 장수 신부님의 별세에 대한 슬픔을 너무 빨리 잊어버렸습니다. 작년에는 메스트르 신부님의 별세로 또다시 쓰라린 슬픔을 맛보았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은 말할 수 없는 노력과 인내로 견뎌내셨는데 마침내 하느님의 허락하심으로 기적적으로 조선에 입국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다른 이들보다 더 오래 사시기를 희망하였는데 입국하신 지 겨우만 4년이 지난 작년에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 때문에 그토록 오랫동안 참을성 있게 겪으신 온갖 고초를 잘 알고 있으며, 그분의 인내심과 양순한 성격 때문에 그분을 지극히 사랑하여왔습니다. 그런즉 신부님께서 저와 모든 신자들의 슬픔이 얼마나 큰지 가히 짐작할 수 있으시겠지요.
그분의 죽음을 애도하는 외에도 이제는 다른 선교사들의 건강도 크게 걱정이 됩니다. 특히 베르뇌 주교님께서 너무나 노심초사하시고 과로하시므로 나날이 생명이 꺼져가고 계십니다. 만일 우리가 주교님을 잃게 되면 누가 우리를 위로해줄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무한하신 자비로 우리의 무수한 죄과를 불쌍히 여기시어, 지극히 좋으시고 조심성이 많으신 우리 주교님을 장수케 하시며 덕화가 날로 융성케 해주시기를 빕니다. 만일 우리의 죄악을 기억하신다면 우리에게 어떠한 재난으로든지 벌하시더라도 다만 우리 목자만은 앗아가지 마시기를 법니다. 

또 큰 흉년이 들어 가득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더욱 못 살 지경 입니다. 전에는 쌀 한 말에 20푼이나 25푼에 살 수 있었던 것이, 지금은 80푼이나 90푼까지 올랐고, 어떤 곳에서는 120푼이나 그 이상에 팔립니다. 
그뿐 아니라 하늘에(1857년 10월 7일에 혜성이 나타나서) 변칙적인 별자리[星座]를 보고 조선 전체가 인심이 흉흉합니다. 머지않아 서양 함선들이 쳐들어와서 조선을 전복시킬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전국적으로 나돕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서양 함선들이 빨리 오기를 조급하게 기다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조선은 이 상태로는 지탱할 수 없고 자멸할 것이다. 차라리 서양 함선들이 빨리 와서 더 좋은 상태로 철저하게 개혁할 필요가 있다. 우리 조정을 다른 형태로 바꾸는 것이 훨씬 낫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벌써 지난해부터 많은 점쟁이들이 나타나 서양 함선들이 언제 오고 또 몇 척이나 올 것인가를 예언하는 소문이 떠들썩합니다. 어째서 민심이 온통 이렇게 돌아가고 마음의 동요가 심하게 생기는지 모르겠습니다. 
조선 전체가 장차 천주교 나라가 된다고 그럴싸하게 예언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것이 과연 하느님의 어떤 암시나 예시일까요? 현 조정은 이제까지는 우리 천주교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현 정권을 잡은 대신들은 안동 김씨 집안 출신들인데, 이들은 일반적으로 신자들에게 지나친 적대감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은 특히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에 와 있는 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모르는 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국적인 잔혹한 박해는 없습니다마는, 그렇다고 해서 천주교를 전하고, 천주교에 입교하는 데 자유가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천주교를 금하는 박해령(迫害令)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므로, 누구든지 자기 마음대로 신자들을 괴롭힙니다. 즉 마음이 착한 관원들은 천주교인들을 묵인하지만, 마음이 악한 관원들은 교우들을 괴롭히거나 그들의 재물을 빼앗기 위해 박해합니다. 
더구나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즉시 모든 세속적 굴레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께 헌신하지 못하고, 종교의 자유가 올 때까지 망설이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들은 천주교의 진리를 깨닫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동되어 한편으로는 신앙을 포용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는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박해를 만나면 극도의 어려움과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므로, 차라리 종교의 완전한 자유가 공식적으로 선포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떠도는 소문으로는 머지않은 장래에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리라고 예언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종교의 자유가 왔을때 별다른 손해 없이 자기의 구원을 얻으리라고 계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 박해의 위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모든 난관을 극복하여 용맹하고 굳세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한 가지 예로, 우리나라 최고 양반 집안 출신인 김 베드로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옛날에 중국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 왕이 김씨라는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군대를 중국에 보내어 중국 천자를 돕게 했습니다. 김 장군이 용감히 싸워서 반란을 진압했고 또 다른 혁혁한 공훈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중국 황제가 김씨에게 큰 벼슬을 내려 요동의 방백 영주로 삼았고, 그 후손들에게도 대대손손이 찬란히 높은 벼슬을 내려서 그 집안이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 후손 중 하나가 왕도(서울)에서 부유하게 살았는데 그들은 삼 형제였습니다. 맏형은 고관이 되어 따로 나가 살고, 두 동생이 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둘째가 지금 이야기의 주인공인 김 베드로입니다. 

김 베드로는 스물네 살이 될 때까지 그와 비슷한 운명을 타고난 처지의 사람들이 흔히 살아가는 방식대로 온갖 악덕을 저지르며 살았습니다. 그는 자기 나이 또래들보다 훨씬 더 주색잡기로 방탕하였습니다. 그는 호기심과 사치심에서 여러 시골 지방을 유람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여인을 첩으로 삼았는데 자기 말로는 넷이라고 합니다. 그는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하여 처음에 토속 신앙을 믿었다가 조선 안에 떠돌아다니는 그 밖의 모든 종교를 다 믿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종교에서도 마음의 만족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들 종교 안에서 합당한 진리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침내 천주교 교리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천주교 교리를 처음 들었을 때도 전부가 다 진리인 듯이 보이지는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천주교 신앙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기꺼이 버리는 순교자들이 많은 것을 보고서 그 종교 안에 무슨 위력이 있는 줄로 깨닫고 깊이 심사숙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쳐줄 신자를 찾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는 자기 친구 하나가 그가 살던 곳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시골에 내려가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친구가 자기 고향을 버리고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험악한 산 속에서 은둔 생활을 한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찾으러 길을 떠났습니다. 여러 날 만에 그 친구가 몇몇 교우들과 함께 살고 있는 마을에 도착하였습니다. 
마을 이장과 주민들이 그를 대하는 눈초리가 사나웠습니다. 그 친구는 한편으로는 (천주교를 알고 싶어 하는) 베드로의 생각을 전적으로 물리치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자기가 천주교 신자임을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보여주면서 베드로의 (진리에) 굶주린 영혼을 최대한 진정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 친구가 참말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는 것을 눈치 챘습니다. 
그 친구는 처음에는 베드로의 성실성을 믿지 못하여 속마음을 주지 않고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가 찾고 있는 진리에 대하여 정신을 집중시 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친구와 그 마을의 신자들의 말과 행동을 보고서 베드로는 그날로 천주교 진리에 대하여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천주교에 입교할 결심을 세우고 이 결심을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다음날부터 천주경, 성모경, 천주십계, 신덕송, 망덕송, 애덕송을 배워 암송하였습니다. 
독실한 신자가 된 후 그는 친구와 작별하고 다시 길을 떠나 서울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귀가 길에 많은 친구들과 여러 연인들을 만났으나 그들과의 지난날의 사귐을 단호히 물리치고 자기 자신을 극복하였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또 끊어버리고 싸워서 더 큰 승리를 거두어야 할 대상이 많았습니다. 
그는 모친과 형제들, (아내는 이미 사망하였으나) 첩들, 남종, 여종, 가문의 세력, 조상들의 위패, 많은 친구, 친척, 굉장한 논밭 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 중 한 가지라도 남겨두면 적을 정복하지 못하고 승리가 위태롭게 되는 것들이었습니다. 
특히 모친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결심을 모친에게 밝히면서 천주교의 주요한 진리들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모친도 자기와 함께 천주교 신앙을 믿기를 바란다고 권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친은 전혀 들으려 하지 아니하였을 뿐 아니라 격분하여 울고불고 협박까지 하면서 그의 결심을 되돌리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모친은 그러한 협박이 아무성과가 없음을 보자, 그의 큰아들에게 일러서 동생을 죽이라고 명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전혀 겁내지 않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어머니와 형님에 의하여 기쁘게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저를 죽이지도 아니하고 그렇다고 해서 저와 함께 천주교 신자가 되고 싶지도 않으시면 저를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는 모든 가족을 영원히 작별하고 먼 지방으로 가서 천주교를 믿겠습니다. "마침내 모친이 설복되어서 아들과 화해하였고, 아들에게 "네가 좋게 여기는 것이라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나는 전혀 상관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조상의 위패와 미신 물건들을 다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린 채 밤중에 일어나 모친과 동생들을 데리고 서울 집을 떠나 시골로 내려가 전에 자기가 복음을 들었던 마을로 갔습니다. 이리하여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갑자기 부자에서 가난뱅이로 되었고, 교만한 양반에서 비참한 시골뜨기로 변했습니다. 

신부님께서 지루하지 않으시다면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하겠습니다. 
어느 관장이 한 관아의 관기(官妓)중 한 사람을 첩으로 삼았습니다. 조선에는 오랜 관습에 의한 제도로서 각 고을마다 관기라는 여자 단체가 존재합니다. 그 단체는 사춘기 소녀들이 고을 관장에게 시중을 들게 될 나이에 이를 때까지 교육받고 관기가 되는 기관입니다. 그 어린 처녀들은 원님이나 어떤 남자가 나타나 일정한 금액을 지불하고 기적(妓籍)에서 제적하여 자기의 첩으로 삼기 전에는 각 고을 관청에 매여 있어서 합법적인 서방도 가질 수 없고 다만 관장이나 아전들의 성욕을 만족시켜줄 준비를 하는 기생들입니다. 
조선에는 또 통인(通引)이라는 단체도 있습니다. 이 단체는 관장에게 시중들기 위하여 사춘기 소년들을 뽑아둔 단체 입니다. 통인들은 통상적으로 아전들의 아들들인데 장가들기 전에 통인 노릇을 합니다. 그들 중에서만 아전이 됩니다. 

그런데 관장의 첩이 된 이 관기가 관내의 어떤 통인과 눈이 맞아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관장이 이 사실을 알고, 그 첩을 그녀의 기적이 있는 본 고을로 내쫓았습니다. 그 첩은 그 통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몰래 그곳에 다시 돌아와 그 통인과 함께 도망쳐서 어느 산 속으로 들어가 살았습니다. 거기서 이 남녀는 교우들을 만나 천주교 교리를 배워 열심한 교우가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화려한 옷을 입고 노래와 춤으로 즐기고 온갖 정욕에 방종하던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험악한 산 속에서 자기 손으로 농사를 지으며 악의악식(惡衣惡食)으로 생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열심한 신앙 생활은 모든 교우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어느 여인 하나가 여러 해 전부터 천주교를 믿으려 하였으나 남편이 결사적으로 포악하게 금하였습니다. 또 천주교 교리를 몰래라도 가르쳐줄 신자를 만나지 못해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여러 차례 집을 몰래 빠져나와 어느 친척 교우한테 가서 교리와 기도문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여러 해 동안 큰 노력 끝에 세례성사를 받았습니다. 이를 안 남편이 크게 분노하여 자기 아내에게 미신 행위에 참여하도록 강요하였으나 그리스도의 충실한 여종은 끝끝내 거부하였습니다. 마침내는 남편이 자기 아내를 때려죽이려 하자 그 여인은 몰래 도망쳐 나와 교우집으로 돌아다니면서 걸식하며 살아갑니다. 그 여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스스로 남편과 자식들과 가정을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전번의 제 편지에 어떤 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 청년이 소문으로 천주교 교리를 듣고, 어느 공소 회장을 찾아가 천주교 교리를 가르쳐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는 여러 번 거절을 당하였으나 마침내 교리를 배웠습니다. 그는 여러 집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교회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가족들이 이사하여 다음해에는 세례 받을 준비를 다 마치고 자기 마을에서 공소 집을 차리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가 약속한 그 해에 제가 그 새 공소 집에 도착하였을 때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그들의 집에 들어가서 인사하자마자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교우들 전체가 어떤 감정이 복받쳤는지 모르겠으나, 목을 놓아 대성 통곡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의 울음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시켰고 그들의 눈물이 얼굴과 옷을 적셨습니다. 저는 영문을 몰라서 그들에게 잠잠하라고 소리를 질렀고, 한참만에야 그들을 간신히 진정시켰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열성적으로 기도와 교리문답을 익혔는지 제가 공소 방에 들어가 찰고를 받을 때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겨우8, 9, 10세 밖에 안 된 어린 꼬마들이 교리문답 전체와 굉장히 긴 아침기도와 저녁기도의 경문을 청산유수로 외우는 광경은 신기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여러 사람들이 그 중에도 특히 노파들이 우둔함을 무릅쓰고 열성을 부리는 모습을 바라볼 때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재능도 부족하고 기억력도 흐려서 경문을 하루 종일 배우면서도 한마디도 입에 담지 못하며 애를 쓰는 모습이 안쓰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 마을과 연관을 맺고 지내는 이웃 근방의 12가족도 이들의 영향으로 전부 입교하였습니다. 이 마을에 식구가 꽤 많은 집안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집 식구들이 천주교 교리를 들었으나 외인들의 이목이 두려워서 천주교 믿기를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 집에 열세 살 된 아이가 자기 부모와 형들의 우유부단한 태도에 화가 치밀어서 미신 단지와 미신할 때 쓰는 기구 등을 내동댕이치고 깨뜨리면서 "왜 이 따위 괴악한 물건들 때문에 우리 주님이신 하느님을 공경하지 못하고 우리 영혼을 구원하지 못한단 말입니까?"하고 말하였습니다. 꼬마가 한바탕 소란을 피운 다음 온 집안이 천주교를 믿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해에 예비교우들이 상당히 많아서 4백 명이 넘었으나, 영세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교님께서 사본문답(四本問答)을 전부 완전히 배우지 못한 자에게는 세례성사를 주지 말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교리문답책(Catechismus)은 천주교의 주요한 교리를 묻고 대답하는 문답 형식으로 설명한 천주교의 공식 교리책이다. 세례성사문답, 고해성사문답, 성체성사문답, 견진성사문답을 합친 것을 사본문답이라고 일컫는다. 그 중에서 견진성사문답이 빠진 것을 삼본문답이라고 말한다. 1931년에 조선 천주교회에서 새롭게 발간한 천주교 요리문답은 320개의 문답으로 되어 있다.)
사실 사본문답 전체를 완벽하게 익혀서 세례 준비를 마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사본문답을 전부 배우자면 몇 해가 걸려야 하는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심지어는 죽을 때까지 교리공부를 하여도 사본문답을 다 떼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편지의 첫머리에 1858년 7월 26일에 신부님께서 보내주신 편지와 회람 공문에 대해 신부님께 감사를 드리려 했는데 깜박 잊었습니다. 이 공문을 보고 동료 신부님들한테서 들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주교님의 허락을 받고 신부님께 여러 가지를 청구 하였는데, 아직도 보내시지 않았다면 신속히 구하시어 기회 있는 대로 빨리 보내주십시오.
이번에 또 한 가지를 청하겠습니다. 서양 음악을 여러 가지 음향으로 소리가 잘 나게 연주할 수 있는 견고하게 만들어진 악기를 하나 보내주십시오. 여러 개의 건반이 있는 약 30프랑짜리 되는 것으로 보내주십시오. 대금은 제가 주교님께 올리겠습니다. 
또 무엇보다도 저 자신과 저의 신자들을 위해 신부님께서 열절하신 기도를 많이 드려주시기를 청합니다. 또 가장 훌륭한 선교사 신부님들을 될 수 있는 대로 조선에 많이 보내주십시오. 그리고 아마 주교님께서도 신부님께 부탁하셨을 줄로 믿습니다마는, 조선으로 배정되는 각 선교사신부님들에게 사천(四川) 대목구 시노드 회의록을 한 권씩 주시고, 특히 회의록 제10장과 부록 14조부터 끝까지 잘 읽게 해주십시오. 미리 잘 읽어두어야 할 대목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 대목구에서는 1857년에 처음으로 성직자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때에 이 회의에서 결의된 것 외에는 모두 사천 대목구 지도서를 조선에서도 따르기로 결의하였다. 중국 사천 대목구 지도서의 제10장에는 신자들에 대한 선교사의 행동 지침이 규정되어 있고, 부록에는 여자들에 대한 선교사의 행동 지침이 규정되어 있다.)
페롱 신부님께 대해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잊어버리고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페롱 신부님께 대하여 할 이야기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장황하게 말씀드리는 것은 부질없는 짓으로 여겨집니다. 다만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씀드리며, 우리 둘은 서로 단짝입니다. 페롱 신부님은 지금 건강하게 잘 있습니다. 신자들한테 사랑도 아주 많이 받고 있습니다. 
공경하올 사부님께, 지극히 순종하는 조선 포교지의 아들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 


● 최양업 신부의 열여섯 번째 편지 
발신일 : 1858년 10월 4일
발신지 : 오두재
수신인 : 리부아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공경하올 리부아 대표 신부님께
작년에 신부님께 편지를 보내고, 또 르그레주아 신부님과 페낭에 있는 우리 신학생들에게도 편지를 보냈는데 신부님께서 다 받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신부님께 대해서는 파선 당하였다가 생환한 제주도 사람한테 들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들은 것이 없습니다. 그는 상해에서 중국 관원에 의하여 북경으로 인도되었고, 거기서 조선에까지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바울리노가 전해준 편지와 신자들을 찾기에 필요한 안내 정보를 가지고 교우들을 찾았습니다.(바울리노는 페낭에서 공부하던 조선 신학생인데 그 당시 홍콩에 소재한 파리 외방 선교회 대표부에서 요양 중이었다.)
그는 크게 고생은 하였으나 하느님의 은혜로 다행히 교우촌을 발견하고, 또 그곳을 거쳐 저와 페롱 신부님이 함께 있던 교우촌에까지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우리는 그가 겪은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때 참으로 하느님의 무한하신 인자와 섭리에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기묘한 방법으로 그에게 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주민들에게까지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교우를 찾으려는 열성을 보면 진실한 사람이고 믿을 만한 사람이며 장차 좋은 교우가 될 사람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아직까지 복음의 씨가 떨어지지 않은 제주도에 천주교를 전파할 훌륭한 사도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는 우리와 작별하면서 자기가 고향 제주도에 돌아가면 먼저 자기 가족에게 천주교를 가르쳐 입교시킨 후 저한테 다시 오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오늘까지 그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혹시 그가 바다를 건너가다가 또 파선이 되어 죽지나 않았는지? 그렇지 않으면 제주도에서 전교하다가 관헌에 잡혀 죽지나 않았는지 몹시 걱정이 됩니다. 
제주도라고 하는 섬은 옛날에는 독립되어 있다가 후에 조선에 합병되었는데 상당히 크고 비옥한 섬입니다. 각 관장이 다스리는 행정 구역이 셋으로 나누어져 있고, 인구는 저의 계산으로 약 4만 명이며 주민들 성품이 사납다고 합니다. 
정부로부터 파견된 관원들이나 관청으로부터 허가를 받은 장사꾼들 외에는 누구도 제주도 상륙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또 제주도에서 육지로 나가는 것도 남자들에게는 관청의 허가가 있어야 하고, 여인들에게는 엄금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 섬에 교우가 있다 하더라도 현재로서는 선교사 사제가 들어갈 방도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하느님께서 저들에게 복음을 전해 받을 은혜를 주신다면 선교사 사제가 들어갈 수 있는 길도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 밖의 것에 대하여서는 신부님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미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어제 쓴 편지에 ) 다 말씀드렸습니다. 신부님께서도 그 편지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저를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도 신부님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공경하올 사부님께, 지극히 순종하는 아들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