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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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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良业简历 

 

1821          3  1日,  在韩国忠清道 出生。

1837(16)  6  7日,  来到澳门留学。(读哲学)。

1842(21) 10 25日,  到庄河蓉花山白家店。

1844(23)                     在长春八家子升执事。

1847(26)  8 26日,  在上海徐家汇神学院读书(神学)。

1849          4  15日,   在上海张家杵臼天主教以韩国第二神父,升神父。

1849(28)                     来到庄河市蓉花山镇天主教常工作。

1861(40)  6 15日,  回韩国后1人十多年来很辛苦地工作中在路上累死了。

2016         4  26日,    以可敬者Venerable宣布。(韩国第一作证的可敬者。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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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良业简历 

 

1821          3  1日,  在韩国忠清道 出生。

1837(16)  6  7日,  来到澳门留学。(读哲学)。

1842(21) 10 25日,  到庄河蓉花山白家店。

1844(23)                     在长春八家子升执事。

1847(26)  8 26日,  在上海徐家汇神学院读书(神学)。

1849          4  15日,   在上海张家杵臼天主教以韩国第二神父,升神父。

1849(28)                     来到庄河市蓉花山镇天主教常工作。

1861(40)  6 15日,  回韩国后1人十多年来很辛苦地工作中在路上累死了。

2016         4  26日,    以可敬者Venerable宣布。(韩国第一作证的可敬者。 <더보기>




 

최양업 신부의 편지 : 7번 째 (도앙골에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829회 작성일 19-03-29 14:14

본문

● 최양업 신부의 일곱 번째 편지 
발신일 : 1850년 10월 1일
발신지 : 도앙골
수신인 : 르그레주아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공경하고 경애하올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드디어 그렇게도 오랜 동안 소망하던 때가 왔습니다. 저의 가련한 조국에서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저의 형제들에 대해 사랑하올 신부님들께 편지를 쓸 수 있는 때가 마침내 왔습니다. 지난해에 상해에서 신부님께 편지를 썼을 때 제가 중국에서 마지막 편지를 드리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또 다가오는 겨울에 조선으로 들어갈 원정을 다시 시도할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마지막 원정은 그 이전의 여행들에 비하여 지루하고 길었습니다. 필요한 것들이 더욱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희망은 훨씬 더 적어 보였습니다마는 그럴수록 저로서는 내적으로 더욱 큰 신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우리 안에서 더 미약할수록 우리는 그만큼 하느님 안에서 더욱 강해지게 마련입니다.
저는 5월에 함선을 타고 상해를 떠나 다시 요동으로 왔습니다. 여기서 7개월 동안 머물면서 대목구장 직무대행이신 베르뇌 신부님의 명령에 따라 병자들을 방문하고 (병자성사를 집전하고) 신자들에게 주일과 축일에는 짧은 강론을 하며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큰 축일에는 고해성사를 주며 성체를 배령하게 해주는 일에 정성을 다 바쳤습니다. 
(베르뇌 신부는 마카오에서 김대건과 최양업을 가르치다가 만주 대목구에 배속된 선교사다. 그는 후에 제4대 조선 대목구장이 되었다.) 
존경하올 페레올 주교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저는 12월에 변문으로 해서 조선에 들어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도 저와 함께 변문으로 가기를 원하였습니다. 비록 성공할 희망은 별로 보이지 않았습니다마는, 어떻든지 무슨 기회가 오기만 하면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변문에 도착하여 보니 (조선 안에 계시는) 존경하올 페레올 주교님께서 보내신 밀사들이 와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과 더불어 메스트르 신부님도 저와 함께 입국시켜드리려고 백방으로 궁리해보았으나, 현명하지 못한 처사로 판단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쓸쓸히 떨어져 슬퍼하시는 메스트르 신부님을 중국에 남겨둔 채 어쩔 수 없이 저만 혼자 (조선에서 마중 나온 사람들과 함께) 조선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험악한 길을 계속하여 개척해나가면서 조선의 철통같이 굳게 닫힌 관문을 뚫고 통과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는 관문 경비초소의 경계망을 들키지 않게 피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모든 기대와 희망을 하느님의 자비하신 전능에 의탁할 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지하고 체포될 각오를 단단히 하고서 밤중에 관문 경비 초소에 다가갔습니다. 압록강 강변을 지키는 경비병들의 일상 업무는 성벽 위와 읍내로 들어가는 성문에서 경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은 칠흑같이 캄캄한 밤이었고 거기다가 광풍이 참으로 거세게 불었으며 혹독한 추위에 몸이 얼어붙을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그 때문에 경비병들이 집 안에 꼼짝 않고 갇혀 있었던 모양입니다. 우리가 관문 한복판을 지나왔는데도 우리가 지나가는 것을 눈치 채거나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위험을 모면하고 나서는 별로 큰 어려움 없이 서울까지 갔습니다.
서울에서 하루를 묵고 나서, 그때 충청도에 머물고 계시던 주교님을 뵈러 길을 계속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중병을 앓고 계시는 다블뤼 신부님께 가서 병자성사를 집전해드려야 했습니다. 그런 다음 주교님께로 가서 보니 주교님도 열병을 앓고 계셨습니다. 저는 하루 동안 주교님과 담화를 나눈 후 잠시도 휴식을 취하지 못한 채 곧바로 전라도에서부터 공소 순회를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의 보호를 받아 저는 6개월 동안에 5개 도를 무사히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두 군데에서만 약간의 위험을 겪었습니다. 
한 곳에서는 어떤 작은 마을에 여교우 3명만이 있었는데 외교인인 부모들과 남편들과 함께 역시 외교인들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방문하려고 미사 가방을 챙겨가지고 전교사를 데리고 저녁 무렵에 아주 초라한 집에 가서 머물렀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이 제가 그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서양 사람인 줄로 의심하고 즉시 마을 이장에게 달려가 알렸습니다. 마을 이장이 그날 밤 안에 저를 잡아 죽일 의논을 하자고 그 마을의 모든 연장자들을 소집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우리는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 있었고 도망칠 수도 없었습니다. 
온 마을이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으므로 우리가 도망을 친다면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가 들었던 집에 대해서도 마을사람들의 성을 돋우어 광분하게 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보호 아래로 달려들고 하느님의 뜻에 모든 것을 온전히 맡겼습니다. 외교인들의 고함 소리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 체하면서 밤새도록 저들이 쳐들어오기만 대비하고 그곳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버텼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의견이 서로 엇갈려 우리가 아침에 그 마을을 떠나가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그 세 여교우들을 만날 수가 없었고 이 때문에 의기소침한 그들을 외로움 속에 버려두고 떠나왔습니다. 
또 한 곳은 거의 2백 명이나 되는 신자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공소 사목을 시작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마을 이장에게 제가 여기 있다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그 이장은 자기 마을에 서양 사람이 와 있다고 마을사람들에게 떠벌리면서 마침 바로 그 시각에 제가 고해성사를 집전하고 있는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는 저에게 점심때부터 밤중까지 욕설과 저주와 협박 공갈을 퍼부었습니다. 그는 제가 아주 고약한 서양 놈이요, 프랑스 놈이라고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너는 큰 도둑놈이다. 너는 우리한테서 도둑질을 하려고 프랑스에서 온 놈이지? 너희 서양 놈들은 사기꾼들이요 프랑스 놈들은 선동꾼들이다. 우리를 이렇게 소란스럽게 하고 속이는 것이 너희에게 무슨 이득이 되느냐? 네가 어디 견딜 수 있나보자. 너는 내일 붉은 오랏줄에 꽁꽁 묶여 도둑놈들의 감옥으로 끌려갈 것이다." 등등. 이렇게 그들은 계속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마침내는 제풀에 지쳐서 잠을 자러 갔습니다. 
저는 전교사와 공소 회장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한밤중에 일어나서 날이 새기 전에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 전날에 고해성사를 받고 영성체 준비를 한 이들이 미사를 간절히 기대하였는데도 저는 미사도 못 드리고 도망쳤습니다. 
성사를 받지 못한 다른 신자들은 다음날 저를 뒤쫓아 백 리나 되는 험준한 길에도 불구하고 다른 교우촌까지 와서 성사를 받았습니다. 마을에서 나올 수 없었던 그 밖의 신자들은 실망과 한숨 속에 그냥 내버려졌습니다. 
저는 교우촌을 두루 순회하는 중에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들을 도와줄 능력이 도무지 없는 저의 초라한 꼴을 보고 한없이 가슴이 미어집니다. 저들은 포악한 조정의 모진 학정 아래 온갖 종류의 가렴주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얽히고 설켜서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비참한 곤경에 빠져도 손가락 하나 옴짝달싹할 수 있는 자유조차 없습니다. 
동포로부터 오는 박해, 부모로부터 오는 박해, 배우자로부터 오는 박해뿐 아니라, 친척들과 이웃들로부터도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험준한 산 속으로 들어가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초라한 움막을 짓고 2년이나 3년 동안만이라도 마음 놓고 편안히 살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처럼 고난에 찬 예를 한두 가지 들어드리겠습니다. 
어떤 양반집 출신의 처녀가 열다섯 살 때에 천주교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처녀는 천주교를 봉행할 마음이 간절하나 자기 아버지 집에서는 종교를 실천할 수가 없기 때문에 집에서 도망쳐 나와 교우들을 찾으러 가던 도중에 길에서 어떤 외교인 남자에게 납치를 당하여 억지로 그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 납치자의 집에서 12년 동안 살았으나 자기 부모한테도 어느 교우한테도 아무런 소식도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나 다시 도망할 궁리를 하고 있었으나 어디로 도망가야 피신처를 찾아낼지 몰랐고 또 혹시 도망치다가 다른 납치자의 손에 떨어질 위험도 있었습니다. 
우연히 교우 하나가 어떤 외교인 친구가 이 여인에 관하여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의 친척으로 가장하여 그 여자를 찾아가서 여러 가지로 위로해주고 천주교 교리와 기도문을 배우라고 책 몇 권을 구해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에게 성사를 받게 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저는 또 양반집 출신인 안나라는 여교우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여자는 19년 동안 철저한 외교인 집안에만 갇혀 지내면서 신자들과 연락을 하지 못했고, 따라서 성사를 받지 못한 채로 지냈습니다. 
바로 올해에 그 여인은 친척 되는 어떤 신자에게 소식을 전할 수가 있어서, 이 신자가 안나를 찾아가서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안나가 사는 집에서 50리 떨어진 공소 집에 있었습니다. 그 신자가 저를 찾아와서 안나가 얼마나 열심하고 또 얼마나 간절하게 저를 기다리며 또 철저한 외교인 집안에서 얼마나 처량한 처지에 있는지를 얘기해주었습니다. 마을 전체가 온갖 미신을 숭상하는 곳에서 혼자서도 그렇게 요랜 세월 동안 신자의 본분을 조금도 궐한 적이 없었답니다. 끊임없이 성사 받기를 간절히 원하며 자기에게 사제 한 사람을 보내주시기를 하느님께 줄기차게 애원하여 기도하였답니다. 
안나는 외로움을 스스로 달래느라고 가끔 유럽에서 생산한 자그마한 천 조각을 집어들고 들여다보면서 유럽과 선교사 신부님들을 생각하곤 하였답니다. 그 물건이 유럽에서 운반되어온 것이니만큼 머지않아 선교사 신부님들도 다시 올 것인즉, 언젠가는 신부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위로했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그냥 참고 지낼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이 충실한 여교우에게 가까이 가서 성사를 집전해줄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으나 저는 온전히 하느님의 자비를 의지하고 안나의 진심을 신뢰하였습니다. 지극히 착하신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마침내 그토록 간절한 안나의 애원을 불쌍히 여기시어 그처럼 충실한 당신의 여종에게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집전해줄 수 있는 방법을 제게 알려주시리라고 희망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유일한 위로인 성체를 모시고 저에게 안나의 얘기를 들려준 그 신자를 데리고 허둥지둥 서둘러 황급히 안나가 사는 마을로 달려갔습니다. 
그 마을 전체가 외교인들이었고 그 집 안 식구들도 모두 외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런즉 고해소를 꾸밀 곳도 마땅치 않았고 성체를 안치할 만한 마땅한 장소가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저는 마치 길 가다가 피곤하여 노독을 풀고 뜨거운 햇볕을 피하기 위해 잠깐 쉬는 것처럼 강가의 나무 그늘에 앉아서 기다렸습니다. 그러는 한편 제가 그 여인을 상면할 만한 장소를 찾을 수 있는지 알아 보도륵 저와 동행하여 온 그 신자를 정탐으로 보냈습니다. 그 신자가 안나의 집에 들어가보니 그 집 남자들은 모두 밭에 나가서 집 안에는 어른이 아무도 없고 안나 혼자 자기 딸과 어린아이 몇 명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 신자는 그 열심한 여교우가 성찰한 것을 적은 쪽지를 저에게 가져왔습니다. 저는 앉은 자리에서 그것을 읽고 즉시 안나의 집으로 들어가 안나를 바깥 사랑방으로 불러내어 재빨리 사죄경을 염해주고 성체를 영해준 다음 곧바로 도망치다시피 나왔습니다. 그때 저는 아주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최상의 감사를 드리면서 빠져나왔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우리는 거룩한 우리 종교를 실천할 자유가 조금도 없습니다. 사방에 궁핍 투성이요 사방에 투쟁뿐입니다. 우리는 마치 지극히 큰 죄나 저지르는 듯이 항상 전전긍긍 떨고 있으며, 사람들은 공연히 우리를 미워하고 마치 우리를 흥악범들처럼 멸시합니다. 
만일 누가 신앙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 즉시 온 가족과 친척들과 이웃사람들이 벌떼같이 들고일어나 공격하고 그를 인간 중에 가장부도덕한 자로 여겨 저주를 합니다. 온갖 방법으로 못살게 괴롭힙니다. 결국은 그를 멀리 쫓아내고 다시는 자기 동족들 가운데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합니다. 
특히 양반들은 그들 중에 누가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 사람을 더욱 격렬하게 핍박합니다. 가족 중의 어떤 이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그의 가문 전체가 불명예로 낙인이 찍히고, 그 집안의 모든 영광과 모든 희망이 걸려 있는 양반의 칭호를 박탈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많은 신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크나큰 악표가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회가 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치욕 속에서 영광을 찾기보다는 헛된 칭호를 누리기를 더 원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떤 품계에 오르게 되면 악표의 바위가 더욱 단단해집니다. 
어떤 신입 교우가 최근에 친구들의 영향력으로 5품 관직에 올랐는데, 그로서는 이 승진을 위해 손을 쓴 일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본인은 아무런 공로도 없고 한 번도 청하지 않았는데 순전히 친척이나 친지들의 영향력만으로 관직을 얻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그런데 그 관직이 어떤 경로로 내려졌든지 간에, 반드시 수락해야 합니다. 만일 (임금님이 내린 관직을) 사양했다가는 철저하게 망신을 당하거나 죽음까지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지금 이 신입 교우는 신앙을 잃어버릴 크나큰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오래지 않아 그 사람은 어떤 도나 큰 도시의 관장으로 발령이 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 관장의 직책을 받아들이면 미신적인 의식에 자주 참여하지 않고서는 그 직분을 수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만일 그 관직을 수락하지 아니하면 반역자로 몰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죽을 위험에 처하게 되고 그의 온 가족은 극도로 큰 환난에 휘말릴 위험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양반집 부녀자들의 처지는 더욱 비참합니다. 여자들은 자기 집 문밖에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합니다. 여자들은 아주 가까운 친척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마주 보아서는 안 됩니다. 알지 못하는 낯선 남자에게 단 한번만이라도 얼굴을 보이게 되면 큰 죄악으로 돌립니다. 
과부가 되면 비록 혼인한 지 단 하루 만에 남편을 잃었다 하더라도 본인이 원하든 말든 상관없이 반드시 수절을 해야 합니다. 만일 재혼하려고 하면 자기 자신은 물른이고 그녀의 불명예로 말미암아 온 가문도 망신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부들도 같은 예절을 지켜야 하며 별로 더 자유롭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항상 밤에 성사를 받으러 옵니다. 이렇게 여자들이 밤길을 다니는 모험을 하는 중에 얼마나 많은 비극을 당할 위험이 있는지 모릅니다. 

한번은 두 여인이 공소 순회하는 사제한테 가려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들은 길을 잘 모르는데 공교롭게도 그날 밤은 칠흑같이 캄캄한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그들이 집을 떠난 지 조금 후에 그만 길을 잃어버려 밤새도록 길 아닌 험한 곳을 헤맷습니다. 이렇게 암흑 속에서 방황하는 동안에 폭포 같은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몸이 흠뻑 젖어 춥고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걸어갈 수조차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시어머니와 며느리인 두 여인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언 몸을 서로 꼭 껴안음으로써 체온을 간신히 유지하였습니다. 
그 두 여인은 새벽녘이 되자 간신히 길을 찾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알고 보니까 자기 집에서 불과 10리밖에 안 되는 곳에서 이런 고생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고생을 하면서라도 성사를 받을 수 있기만 하면 그래도 다행으로 여깁니다. 
외교인 부모나 남편의 슬하에 있는 여교우들은 대개가 성사를 받으러 올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성사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애만 태웁니다. 어느 때가 되어야 저렇게도 천상 음식에 굶주린 영혼들을 실컷 포식시킬 수 있겠습니까. 

단 한 번이라도 사제의 얼굴을 보는 것이 큰 은총입니다. 더 자주 그러한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이틀이나 사흘 길을 걷는 것쯤은 오히려 가깝게 여깁니다. 우리는 신자들이 사제를 보기 위해서나 미사성제에 참여하려고 떼를 지어 한꺼번에 급히 몰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항상 매우 엄격하게 다루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명령을 위반하는 신자들에게 아무리 벌을 내려도 신자들은 이 벌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신자들이 막무가내로 순명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교우촌에 도착하면 어른이고 아이고 남녀노소의 구별없이 모두 새 옷을 갈아입고 신부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그리고 사제가 그들의 인사를 받는 것을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그들은 조금도 참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합니다. 그들은 공소회장들을 연방 들여보내어 어서 인사를 올리고 사제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졸라 댑니다. 
교우촌을 떠날 때에는 우리가 여행할 옷차림으로 갈아입을 때부터 공소 집 전체가 울음바다가 되고 탄식소리로 진동합니다. 
어떤 이들은 저를 못 떠나게 붙들려는 듯이 옷소매를 붙잡고, 어떤 이들은 제 옷깃에 그들의 애정의 정표를 길이길이 남기려는 듯이 제 옷자락을 눈물로 적십니다. 
그들은 저를 따라 나서서 제가 멀리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며 돌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좀더 오랫동안 제 뒷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야산 등성이에 올라가기도 합니다. 
한번은 한 공소에서 다른 공소로 가야 했습니다. 제가 지나가기로 예정되었던 길 근처에 사는 신자들이 와서 자기들 마을에 잠시 들러달라고 간절히 청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간청에 감동하여 소원을 들어주마고 약속했습니다. 
그들 마을에 도착하여보니 그 근방에 사는 신자들이 모두 다 모여서 더할 수 없이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의 한사람은 15리나 떨어진 곳에서 왔었습니다. 그 사람은 제가 그곳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서 자기 집을 비워두고 아내와 열 살쯤 되는 아들을 데리고 집을 떠나 길도 없는 험한 산을 넘어서 저를 만나러왔던 것입니다. 
오! 만일 또 한 사람의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성인이나 베르나르도 성인이 여기 나타나신다면 저렇게도 빈궁한 이들한테서 얼마나 큰 열정으로 환영받을 것이겠습니까! 

제 마음을 극도로 아프게 하는 문제가 또 한 가지 있습니다. 신자들 중에 불타는 열성을 가진 많은 처녀들이 하느님을 더욱 순수하고 더욱 열렬하게 섬기고 싶어서 평생토록 동정을 지킬 작정을 하는 사례가 흔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법률과 풍속은 이 천사적인 정결의 덕행을 위하여 변호나 보호를 해주는 피난처가 전혀 되지 못합니다. 
조선 백성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결혼하여 아들을 낳지 아니하는) 동정생활을 불효로 매도합니다. 모든 이가 정결을 지키는 삶을, 순전히 기만적인 위선에 불과한 것으로 야유합니다.
신자들을 반역도당으로 여겨 누구든지 마음대로 핍박할 수 있고, 가장천한 백성까지도 천주교 신자를 마구 박해합니다. 
신심 깊은 열심한 여인이라도 결혼하지 아니하고 남편이 없으면 외교인들에게 납치되어 갈 위험이 있고, 따라서 그들의 영원한 구원을 위태롭게 할 염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정 생활을 찬양하는 설교자인 우리 사제들이 오히려 어쩔 수 없이 결혼을 권유하거나 강제로 명령하는 자가 되어야 할 지경입니다. 
제가 방금 말씀드린 것을 더 잘 설명할 만한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바르바라라는 처녀가 있었는데 오빠가 8명이 있는 막내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오빠는 다 죽고 오빠 둘만 남았습니다. 바르바라는 일곱 살에 책을 읽을 줄 알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동정을 지키기로 작정하였습니다. 
하루는 올케가 옷 한 벌을 지으면서 바르바라에게 말했습니다. "이 옷은 아가씨 옷입니다. 아가씨 혼인날에 입으실 거예요. "이 말을 들은 바르바라는 즉시 집 안의 가장 으슥한 곳으로 피해 가서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달래면서 앞으로 너를 절대로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약속을 한 다음에야 간신히 바르바라를 달랠 수 있었습니다. 
바르바라가 열한 살 되던 해 어느 날 자기 방 벽에 글 몇 줄을 써놓고 나서 책 2권과 쌀 얼마를 싸가지고 몰래 빠져나가 같은 나이 또래의 소녀 한 명과 함께 밤중에 깊은 산 속으로 도망갔습니다. 아침이 되어 부모들이 깨어나 보니 바르바라가 보이지 않자 찾던 중에 벽에서 바르바라가 직접 손으로 써 붙인 쪽지를 발견하였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사랑하올 부모님, 저를 당신들의 자식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동정 성모 마리아의 딸로 생각하십시오. 이 세상의 삶은 짧습니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허망합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하느님과 함께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의탁하는 자를 영원히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저를 찾지 마십시오. 제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집 사람들이 사방으로 찾아다니다가 사흘 만에 어느 굴속에서 바르바라를 발견하였는데 그곳은 거의 아무도 접근할 수 없을 만큼 험준한 곳이요, 사나운 짐승들이나 출몰할 만한 곳이었습니다. 
겨우 열 살 지난 어린 바르바라는 그 굴속에서 편안하게 책을 읽기도하고 기도하기도 하며 자기 동무를 가르치기도 하고 끝까지 마음이 변하지 말자고 권면하기도 하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따금씩 굴에서 나와 풀뿌리를 캐어 식량 대신으로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바르바라는 그 황량한 곳에서 더할 수 없는 만족한 즐거움을 한껏 맛보고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행복이 뜻밖에 오빠가 나타남으로 해서 한꺼번에 무너졌습니다. 오빠가 오는 것을 보고 호랑이를 본 것보다 더 무서워하였습니다. 바르바라는 자기가 갈망하는 낙원에 그대로 남아 있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오빠는 동생을 타이르고 달래고 엄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르바라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작은 몸뚱이의 온 힘을 기울여 안간힘을 쓰며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러나 결국 오빠의 힘에 져서 억지로 아버지의 집으로 끌려갔습니다.
집으로 끌려오니 어머니가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어떻게 그리 어리석은 짓을 한단 말이냐? 너는 마귀한테 놀림을 당하는 것이 틀림없다. 어떻게 너 같은 어린애가 호랑이도 무섭지 않고, 굶어 죽는 것도 겁이 안 난단 말이냐?" 하고 나무랐습니다. 그러니까 바르바라는 "어머니, 걱정 마셔요.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의탁하는 사람들을 내버려 두지 않으셔요,"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때부터 바르바라는 규칙적으로 1주일에 두 번씩 금식재를 지키고, 고기와 생선 같은 것들은 전혀 입에 대지도 않았습니다. 사순절 동안에는 날마다 하루에 한 끼만 약간의 음식을 먹었습니다. 기도하는 정신이 결코 중단된 적 이 없었습니다. 집안일을 할 때나 들일을 할 때나 항상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조선에서는 일상 기도문이 짧지 아니한데, 바르바라는 그것을 모두 암송하였습니다. 또한 교리 문답책과 신자 교리책 그리고 성녀 바르바라, 성베드로와 바오로의 성인전 및 조선의 여러 순교자들의 행적과 그 밖에도 조선 사람들이 고상하고 신심 깊게 언문으로 쓴 다른 작은 신심서들도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바르바라가 성을 내기나 짜증을 부리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고, 더워 죽겠다. 아이고, 추워 죽겠다. 웬 바람이 이렇게 세게 부나, 웬 비가 이다지도 쏟아지나 !"하는 소리와 이와 비슷한 다른 말은 매우 자연스러운 감탄사지만, 이런 말이 바르바라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아무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부모로서는 바르바라에게 종교 일이거나 세속 일이거나 무엇을 시키려고 명령하거나 권고하거나 지시할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언제나 부모의 뜻을 미리 알아차리고 모든 사람이 만족할 만큼 모든 일을 잘해내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바르바라의 과도한 열성과 지나친 육체 노동을 억제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면 바르바라는 "시간은 짧습니다. 아직 시간이 있을 때 활동해야 합니다. 이 육체는 머지않아 구더기의 양식이 될 것입니다. 이런 육신을 아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살아 있는 동안 힘껏 일해야 합니다. "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병에 걸렸을 때도 신심수업이나 고신극기를 조금도 변함없이 실천했습니다. 사흘거리로 학질을 앓을 때에도 결코 자리에 누워 있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그렇게 육신을 학대하지 말라고 어머니가 꾸중을 하면 바르바라는 "우리 힘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나 하느님께 의탁하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바르바라가 그렇게 늘 고신극기하고 힘든 일로 몸을 학대하면서 어떻게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가 있는지 모든 사람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바르바라는 자기 동료들 중에서 가장 건강하고 용모가 아름다웠습니다. 
바르바라가 열네 살 났을 때 처음으로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고해 사제를 만날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고해 사제께 동정을 지키려는 결심을 말씀드렸습니다. 고해 사제는 그러한 신분에 따르는 위험을 설명해주면서 그러한 계획을 만류하며 결심을 바꾸어 결혼을 하라고 명령까지 했습니다. 
그 다음해에 바르바라는 다시 같은 고해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자기 생각에 변함이 없고 자기 뜻을 계속 지키겠다고 그 신부님에게 말했습니다. 신부님은 동정의 위태로움을 다시 설명하고 동정을 지킬 결심을 바꾸어야 될 이유들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성사를 받고 싶으면 동정을 지킬 결심을 바꾸고, 그러하지 아니하면 성사를 받지 말아라. 이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바르바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잘못 알아듣고 신부님이 내세운 조건을 충실히 지키지 못하고 성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해 사제가 제시한 선택을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고 나서야 자기가 잘못 알아들은 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슬피 통곡하였는데 아무도 달랠 수가 없었습니다. 
바르바라가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어떤 외교인한테서 청혼이 들어왔습니다. 이 외교인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합법적인 방법을 썼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하는 수 없이 폭력을 써서 바르바라를 강제로 납치해 가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바르바라의 부모와 오빠들은 엉뚱하게도 갖은 비방과 행패로 수모를 당했습니다. 궁지에 몰린 부모와 오빠들은 바르바라의 결심을 꺾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썼습니다. "네가 결혼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이 분명하다. 그러니 제발 이웃 신자 청년과 결혼하기를 동의하라."고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헛수고였습니다. 바르바라의 결심은 한결같이 확고부동하고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오히려 바르바라는 아버지와 오빠들의 겁이 많음을 비난하였습니다. "만일 오빠들이 저 외교인들의 핍박에서 저를 보호해주실 수 없거나 보호해줄 마음이 없다면 저를 혼자 내버려 두세요. 저 혼자 어디든지 갈 테니까요. 그러면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고 말하였습니다. 
어느 날 외교인들이 납치하려고 쳐들어오자 바르바라는 산 속으로 달아나 수풀 속에 숨었습니다. 납치하러 온 자들은 바르바라를 찾아내지 못하자 아버지와 오빠들에게 분풀이로 행패를 톡톡히 부리고 갔습니다. 
욕설과 행패를 견디다 못한 한 오빠가 바르바라를 찾으러 나섰습니다. 그 오빠는 밤새껏 큰소리로 바르바라를 불렀습니다. 바르바라는 오빠의 목소리 인 줄을 잘 알았지만, 오빠가 배반할까 봐 못 미더워서 숨은 데서 감히 응답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오빠가 다시 바르바라를 부르면서 찾아 나섰습니다. 바르바라가 숨은 곳에서 나와서 오빠를 위로했습니다. 
바르바라가 혹시 호랑이한테 잡혀 먹히지나 않았을까 하여 밤새도록 걱정하였던 오빠는 바르바라가 눈앞에 나타나자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이슬에 흠뻑 젖은 바르바라가 오빠의 인도로 근심에 잠겨 있는 어머니 앞에 왔습니다. 바르바라는 밝은 낯으로 명랑하게 "어머니, 왜 근심하십니까? 지극히 선하신 하느님께서 보호하시어 모든 것이 다 잘 되어 나갈거예요. 저는 아무 탈 없습니다."고 말하였습니다. 
바르바라는 그런 후에도 한 번 더 산 속으로 도망가서 위험을 모면해야 했습니다. 마침내 바르바라는 모든 것을 버리고 부모와 오빠들과 함께 다른 고장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핍박을 당한 후 바르바라는 훨씬 더 무서운 시련을 겪어야 했지만 그의 항구한 결심은 더욱 굳어질 뿐이었습니다. 
세 차례나 고해소에 들어갔다가 성사를 거절당하고 네 번째 고해소에 들어갔으나 또 그냥 쫓겨 나왔습니다. 
주교님께서 바르바라를 여러 차례나 부르셨습니다. 타이르기도 하시고 권고도 하시며 위협도 하셨으나 바르바라가 듣지 아니하므로 마침내 바르바라와 그의 부모들에게 성사를 받지 못하도록 성사금지의 처벌을 내렸습니다.
이 모든 장애에도 불구하고 바르바라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나날이 더욱 열렬하고 더욱 철저하여져서 어떤 때는 자기의 가흑한 시련이 야속하여 눈물을 펑펑 쏟기도 하고, 자기의 가련한 신세가 서글퍼 흐느껴 울기도 하면서 날마다 고신극기를 배가하였습니다. 
저녁이 되면 혼자서 집을 나가 호랑이를 만날 것도 무서워하지 않고호젓한 개울가로 가서 기도로 밤을 새우곤 했습니다. 
저는 저의 관할 구역 교우촌을 순회하다가 바르바라가 사는 마을 근처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의 전교사인 레오의 집에서 잠시 동안 쉰 다음 기운을 차려 다시 공소 순회를 시작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르바라는 그곳에서 한 마장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바르바라는 제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곧 기쁨에 넘쳐 저를 보려고 단숨에 달려왔습니다. 그러고서는 저에게 시중을 들기 위해 레오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바르바라는 저를 븐 후에는 성사를 받을 방법 외에는 다른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윤리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곳은 제 관할 구역 밖이었고 따라서 저는 그 여자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다 그 가엾은 처녀는 주교님이 내리신 성사 금지 처벌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설명을 들은) 바르바라는 한잠도 자지 못하고 밤새 뜬눈으로 새웠습니다. 바르바라는 자기의 양심을 성찰하여 (자기가 범한 죄를 적은) 쪽지를 동무들에게 보여주면서 "대관절 이 죄들을 어떻게 하면 용서받게 될까?"하고 한탄하였습니다. 또 병들어 앓고 있는 한 친구에게는 "나도 너처럼 병들어 앓기나 했으면 신부님이 나에게도 성사를 주시련만!"하고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러고서는 바르바라는 기도와 눈물로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날이 새자 바르바라는 갑자기 끙끙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날에는 산꼭대기에서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힘든 일을 하던 그녀가 오늘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중에 자리에 눕게 된 것이었습니다. 
(불가피한 상황이니만큼) 저는 이날 바르바라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다음 날에는 성체를 받아 모시게 해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르바라는 심한 고통 중에서도 쉴새 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동정 성모 마리아의 이름을 계속 불렀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바르바라의 죽음이 임박한 줄로 여기고 병자성사를 받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바르바라는 아직은 그리 서두를 것 없다고 대답하며 자기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말했습니다. 
하루가 지난 다음 저는 전교사를 바르바라에게 보내어 병자성사를 받아야 할는지 살펴보고 또 권유도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바르바라는 다시 미루었습니다. 
그날 밤에 바르바라는 곁에 둘러 있는 사람들에게 신부님을 모셔다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은 급박하지 않고 임종이 가까워오지 않았으며 틀림없이 이튿날까지 죽지 않고 견딜 것이니 아직은 신부님을 모져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르바라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렀군요. 이렇게 캄캄한 밤중에 그 험한 길을 걸어오시도록 하는 것은 신부님께 너무나도 번거롭게 구는 짓임을 저도 잘 압니다. 신부님께 그다지도 큰 불편을 끼쳐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그렇지만 신부님을 꼭 뵈어야 할 급한 일이 있으니 귀찮게 여기지 마시고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신부님을 모셔다주세요.“
저는 곧 바르바라에게로 가서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집전해주고 또 임종자를 위한 성모 청원미사를 드렸습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바르바라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몸을 깨끗이 씻겨주고, 명절 옷으로 갈아 입혀서, 공소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청했습니다. 바르바라는 놀랍게도 무릎을 꿇고 노자 성체를 영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르바라는 그날도 하루 종일 몹시 앓았으나 정신은 조금도 흐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더 잘 준비할 수 있도록 마지막 순간까지 맑은 정신을 보존하게 해주시기를 하느님께 기도하였답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그 청을 들어주시어 평소보다 훨씬 더 맑은 정신을 주셨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르바라는 앉아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항상 기도중에 있었습니다. 
바르바라는 "지금 이 시각에도 하느님과 성모님께서 특별히 베풀어주시는 은혜에 대해서 아직도 충분히 감사드리지 못하는 것 외에는 다른 고통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건강이 회복되면 맨 먼저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바르바라는 "저는 이 병든 육체를 떨어버리고 하늘에 계신 천상 아버지께로 가서 제가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를 드리는 것 외에 다른 원이 없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바르바라에게 마지막 작별을 하면서 "네가 세상을 떠난 후에 네 영혼의 안식을 위해 미사를 드려줄 터이니, 그 대신 너도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와 복되신 동정 성모님 앞에서 나를 기억해다오."라고 말했습니다. 바르바라는 더할 수 없이 평온하고 맑은 얼굴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바르바라가 마지막 숨을 거둘 즈음에 의원들이 여러 가지 침을 놓고 뜸을 뜨려고 하니까, 바르바라는 "저는 지금 숨을 거둘 참인데 이런 치료가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상처를 생각하고 이런 치료를 참아 받으라고 타일렀습니다. 바르바라는 그 말을 받아서 이 고통이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면 참아 받겠다고 복창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십자고상에만 눈을 고정시켜 똑바로 쳐다보면서 의원들이 하는 대로 내맡겼습니다. 바르바라는 전에는 침과 뜸을 맞아본 적이 없었지만 온몸을 마구 찌르는 침과 뜸을 차분하고 평온하게 견디어냈습니다. 
바르바라는 여러 가지 구원에 유익한 말로 비애에 젖어 있는 부모를 위로하고 삼종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러고서는 문 가까이 가서 잠시 동안 문지방에 팔을 짚고 있다가 몸이 땅바닥에 푹 쓰러지면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때는 1850년 9월 23일 저녁 6시쯤이었습니다. 바르바라의 나이 겨우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바르바라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그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그의 아름다운 모습과 열절한 신심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바르바라는 앓기 시작한지 나흘 만에 죽었습니다. 바르바라가 죽은 지 열흘이 지났으나 아직도 우리의 얼굴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고, 상금도 그녀를 애도하는 말들이 우리 입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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