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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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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良业简历 

 

1821          3  1日,  在韩国忠清道 出生。

1837(16)  6  7日,  来到澳门留学。(读哲学)。

1842(21) 10 25日,  到庄河蓉花山白家店。

1844(23)                     在长春八家子升执事。

1847(26)  8 26日,  在上海徐家汇神学院读书(神学)。

1849          4  15日,   在上海张家杵臼天主教以韩国第二神父,升神父。

1849(28)                     来到庄河市蓉花山镇天主教常工作。

1861(40)  6 15日,  回韩国后1人十多年来很辛苦地工作中在路上累死了。

2016         4  26日,    以可敬者Venerable宣布。(韩国第一作证的可敬者。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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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良业简历 

 

1821          3  1日,  在韩国忠清道 出生。

1837(16)  6  7日,  来到澳门留学。(读哲学)。

1842(21) 10 25日,  到庄河蓉花山白家店。

1844(23)                     在长春八家子升执事。

1847(26)  8 26日,  在上海徐家汇神学院读书(神学)。

1849          4  15日,   在上海张家杵臼天主教以韩国第二神父,升神父。

1849(28)                     来到庄河市蓉花山镇天主教常工作。

1861(40)  6 15日,  回韩国后1人十多年来很辛苦地工作中在路上累死了。

2016         4  26日,    以可敬者Venerable宣布。(韩国第一作证的可敬者。 <더보기>




 

[인문학 강좌] 최양업 신부와 천주가사 <사향가>

페이지 정보

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479회 작성일 19-06-24 01:37

본문

[인문학 강좌]


최양업 신부와 천주가사 <사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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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수고대하던 희소식이 마침내 도착하였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시복 안건이 2016년 3월 14일 추기경과 주교들의 회의를 통해 교황청 시성성의 성덕 심사를 통과하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시성성 교령을 2016년 4월 26일에 승인함으로써 최양업 신부는 가경자(可敬者, Venerable)로 선포되었다. 방인사제로서 땀의 순교자로 불리는 최양업 신부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뒤를 이어 복자와 성인 반열에 오를 수 있 는 길이 열린 것이다. 

최양업 신부는 충남 청양 다락골에서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복자 이성례 마리 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836년 김대건,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다. 김대건 신부가 1846년 병오박해 때 순교한 후, 1849년에 사제서품을 받고 귀국하여 11년간이나 숨어 다니며 사목하다 선종하였다. 그는 양반계급의 독선, 오만, 횡포, 부도덕이 모든 악의 근원이고 온갖 비참함의 원인이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각종 세금과 수탈과 착취에 짓밟혀 고통받는 가난한 백성들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였다. 이러한 신자들에 대한 사랑과 사목적 열정은 매 년 7천 리가 넘는 여정을 지속하게 한 근원이었다. 그는 귀국 직후인 1850년 1월부터 9월까지 무려 5천 리 길을 걸어 다니며 3,815명에게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집행하 였다. 그의 편지에 따르면, 당시 신자들은 기도문과 교리문답을 암송하여 세례를 받았 다. 그 외에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와 성녀 바르바라의 성인전, 조선 순교자들의 행 적, 한글로 쓴 신심서 등을 암송하였다. 한문을 해독할 수 없었던 신자들은 성경을 읽으며 신심을 다질 수 없었다. 이러한 까닭에 최양업 신부는 한글로 된 문서가 교리 교육에 얼마나 유용한지를 밝힌 바 있었다. 

최양업 신부는 더욱 효율적인 교리교육을 위해 한글문서 이외의 또 다른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8~10세의 어린아이들조차교리문답 전체와 긴 경문을 암기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반면에 노파들을 비롯 한 많은 이들이 재능도 부족하고 기억력도 흐려서 경문을 하루 종일 배우면서도 한마디도 입에 담지 못하며 애쓰는 모습을 안쓰러워하였다. 심지어 죽을 때까지 공부해도 사본문답을 다 떼지 못하는 신자도 있다며 한탄하였다. 


“한글이 교리 공부하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우리나라 알파벳은 10개의 모음과 14개의 자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배우기가 아주 쉬 워서 10살 이전의 어린이들이라도 글을 깨칠 수가 있습니다. 이 한글 이 사목자들과 신부님들의 부족을 메우고 강론과 가르침을 보충하여 줍니다. 쉬운 한글 덕분으로 세련되지 못한 산골에서도 신자들이 빨 리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구원을 위한 훈계를 받을 수 있습니다.” (배티사적지, 《최양업 신부의 서한》, 천주교 청주교구, 1996, 137쪽)

그는 은사인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그러한 형편을 전한 후 ‘여러 가지 음향으 로 소리가 잘 나게 연주할 수 있는 견고하게 만들어진 악기’를 보내달라고 청하 였다. 그가 교리교육을 위해 특별한 방안을 구상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 는 대목이었다. 즉 노래를 통해 더 쉽게 교리서와 경문의 내용을 암기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만들어진 노래 중의 하나가 천주가사 <사 향가(思鄕歌)>다. 사람이 본향을 그리워하며 현세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 한 천주교의 가르침을 당시에 유행하던 가사로 만든 문학작품이었다. 다만 오늘 날의 연구자들 간에 최양업 신부가 이 노래를 직접 창작하였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사향가>는 4음보 416행의 방대한 가사작품이다. “어화 벗님네야 우리락토 찾아가”로 시작하는 1~32행에서 현세는 눈물의 골짜기이자 귀양살이하는 곳 으로 규정한다. 그러므로 영혼의 세 원수인 육신·세속·마귀, 그리고 일곱 가 지 죄의 근원인 교만·인색·음란·질투·분노·식탐·나태 등을 물리치고 천 주를 만날 수 있는 본향을 그리워해야 한다고 노래한다. 이어 33~55행에서 헛된 즐거움에 빠져 살다 죽을 때에 이르러서야 두려워하며 눈물을 흘리지만 소용이 없다고 질책한다. 56~97행에서는 세상살이하면서 시시때때로 엄습해 오는 칠 죄종인 교만은 겸손으로, 인색은 베풂으로, 음란은 정결로, 질투는 사랑으로, 분 노는 참음으로, 식탐은 담박으로, 나태는 부지런함으로 방어하라고 훈계한다. 이어 98~149행에서 세속에 물든 이들이 천주와 참 도리를 알지 못하고, 습 관과 체면으로 허영과 쾌락에 빠져 죽음·심판·천당·지옥을 모르고 있는 처 지를 안타까워한다. 150~185행에서는 적대자들이 부모도 없고 군주도 없는 무 부무군의 삶을 추구하는 천주교 신자들을 비판하며 조롱한다. 이에 시적 화자는 186~234행에서 우물 안 개구리이자 밭도랑 물고기 신세인 적대자들이 하늘이 얼 마나 큰지, 바다가 얼마나 넓은지 어찌 알 것이냐며 반박한다. 뒤이어 235~275행에서는 천주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 보은하는 방 도라고 노래한다. 276~333행에서는 천주존재를 깨닫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며 잘 먹고 잘 입기, 탐욕과 쾌락, 인색과 음란에 빠져있다면 짐승과 다른 점이 무엇 이냐고 반문한다. 334~384행에서는 잠시 머물다 갈 세상에서 체면을 위하고, 즐 거움을 탐하며, 마귀를 섬기다 종국에는 심판과 앙화와 형벌로 인한 무궁한 회한 을 당할 것이라 경고한다. “텬당길흘 바로자 부모 보사이다”라고 마무리 하는 385~416행에서는 사람들이 육신보다는 영혼을, 현세보다는 영원한 세상을, 세상 벼슬과 재물보다는 천당 벼슬과 재물을 생각하며 살아 천당에 가서 대부모 인 천주를 만나 영복을 누리자고 권유한다. <사향가>는 당시의 신자들에게 널리 읽혔던 교리서인 《주교요지》에 기반을 두고 창작되었다. 

《주교요지》는 주문모 신부의 인가를 얻어 복자 정약종이 한글 로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교리서였다. 이러한 교리서의 내용을 더욱 용이하게 ‘조선시대’의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한 <사향가>는 신자 교육뿐만 아니라 비신자와 적대자들을 향한 전교와 호교의 목소리를 동시에 담았던 것이다. 교리의 가사화는 교리서의 대중친화성을 고양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교리의 토착화에 기여하는 일이었다. 다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천주교 교리를 가사라 는 친근한 시가 장르에 형상화함으로써 신자들이 쉽게 이해하고 암기할 수 있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외래의 생경한 가르침을 구체적이고 감각적으로 조선화하는 작업이었다. 특히 <사향가>에서는 죽음 이후의 사심판, 공심판, 천당, 지옥 등 사 말교리에 중점을 두었다. 현세는 잠시 지나가는 풍진세계이므로 현세의 복락을 탐할 것이 아니라, 사후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 였다. 고향인 천당의 영원한 복락을 생각하며 살아야 대부모인 천주를 볼 수 있다 는 지복직관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사향가>는 현세보다는 죽음 이후 의 세계에 무게 중심을 둠으로써 자연스럽게 당시의 순교영성과 긴밀한 연관을 지니게 되었다. 즉 <사향가>를 부르는 이들은 누구나 진리의 길에 들어서서 모진 역경을 이겨내고, 기꺼이 치명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최양업 신부의 시복 시성을 바라는 마음은 그의 삶을 본받아 살아가겠 다는 열망과 다르지 않다. 16살의 어린 나이에 목숨을 걸고 마카오까지 걸어가 공 부하여 사제가 되었던 천주를 향한 열정, 그리고 유일한 방인신부로 11년간이나 숨어 다니며 성사를 집행하였던 신자들을 향한 사랑을 되새기게 된다. 천주의 자 녀로서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던 <사향 가>가 오늘도 새로운 까닭이다. 지금 우리의 가슴은 얼마나 뜨거운가. 그리고 우 리는 어디에 서서 무엇을 바라보고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김문태 힐라리오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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