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최양업 신부님 약력/연보
페이지 정보
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504회 작성일 19-03-27 13:13본문
[한국어] 최양업 신부 연보
1. 신학생 선발과 마카오 유학
□ 1821년 3월 1일 : 최양업, 충청도 홍주 다래골의 새터(현 충남 靑陽郡 化城面 農岩里)에서 성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과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의 6형제 중 장남으로 출생.
□ 1836년 2월 6일 : 부평 접프리 교우촌에서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간택되어 서울 (금부)후동의 신부댁에 도착. 라틴어 수업 시작.
* 부친 최경환은 이후 수리산으로 이주한 뒤 그곳 회장으로 임명됨
* 최방제 3월 14일, 김대건 7월 11일 후동 신부댁에 도착
□ 12월 2일 :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모방 신부가 바라보는 가운데 십자가 앞에서 성서에 손을 얹고 순명과 복종 서약을 함.
□ 12월 3일 : 성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성 조신철(趙信喆, 가롤로), 이광렬(李光烈, 요한) 등의 인도를 받아 중국으로 출발.
□ 12월 28일 : 의주성․압록강․구련성을 거쳐 봉황성 변문(邊門 즉 柵門, 현 요녕성 봉성시 변문진) 도착. 조선 입국차 요동에 머무르고 있던 샤스탕(Chastant, 鄭牙各伯) 신부를 만남.
□ 1837년 6월 7일 : 중국 대륙(심양 → 마가자 → 서만자 ?)을 남하하여 마카오에 도착.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 안의 “조선교구 신학교”에서 신학 수업 시작
□ 11월 27일 : 동료 신학생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위열병으로 사망.
□ 1838년 9월 14일 : 페레올(Ferrol, 高) 신부, 계승권을 가진 조선 대목구의 보좌 주교로 임명됨(1943년 초에 가서야 교황의 칙서를 전달받음).
2. 마닐라 피신과 마카오 귀환
□ 1839년 4월 6일 : 마카오의 소요로 인해 부대표 리브와 신부, 교장 칼레리 신부, 데플레슈 신부 등과 함께 마카오를 출발하여 마닐라로 피신.
□ 5월 3일 : 도미니코회의 롤롬베이(Lolombey) 농장으로 이전하여 그곳에서 리브와, 데플레슈 신부 등에게 수학(11월 26일까지 약 6개월 반 동안 생활함).
조신철(가롤로)과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이 북경에서 보내온 1839년 3월 10일자(혹은 3월 11일자) 서한 1통을 받음
부친 최경환에게 쓴 서한이 조신철을 통해 조선에 전달됨
□ 11월 말 : 마닐라에서 마카오로 귀환.
□ 9월 12일 : 부친 최경환(프란치스코), 기해박해(己亥迫害)로 서울 포청에서 옥사 순교.
□ 1840년 1월 8일 : 매스트르(Maistre, 李) 신부가 마카오에 도착. 신학생들의 교육을 함께 맡음.
□ 1월 31일 : 모친 이성례(마리아), 서울 당고개에서 순교
3. 마카오 출발과 소팔가자 도착
□ 1842년 7월 17일 : 브뤼니에르(de la Brunire) 신부와 최양업, 신학생 범(范) 요한과 함께 프랑스 군함 파보리트호를 타고 마카오 출발. 9월 11일 상해 도착
□ 10월 22일 : 요동 반도의 남단인 태장하(太莊河, 현 요녕성 장하시) 해안에 도착(1차 탐색 여행).
안내인 반 요한이 찾아서 보내온 백가점(白家店, 현 장하시 蓉花山鎭의 岔溝 인근 마을) 교우촌의 회장 두(杜) 요셉과 함께 세관에 감
□ 10월 26일 : 백가점 교우촌에 도착. 두 요셉 회장 집에서 유숙.
□ 11월 : 브뤼니에르 신부와 함께 양관(陽關)을 거쳐 페레올 주교가 있던 장춘 북쪽의 소팔가자(小八家子) 교우촌으로 가서 신학 공부를 계속.
□ 1843년 12월 31일 : 개주 양관에서 있은 제3대 조선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에 참석.
□ 1844년 1월 14일 : 매스트르 신부, 김대건과 함께 소팔가자로 귀환하여 신학 공부 계속.
* 김대건 : 훈춘을 거쳐 경원(慶源)으로 가서 3월 8일에 조선 교우를 만난 뒤 귀환
□ 12월 10일경 : 최양업과 김대건, 부제로 서품됨.
4. 사제 서품과 귀국 후의 선종
□ 1846년 1월 말 : 최양업 부제,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 입국을 위해 만주의 훈춘(琿春)으로 감(2차 탐색 여행).
□ 2월 중순 : 훈춘의 동강자(추정) 마을에서 경원 개시(慶原開市)를 기다리던 중, 만주 관헌에 체포되었으나 3일 만에 석방됨.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소팔가자로 귀환하여 신학생들을 지도함.
□ 12월 말 :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변문(책문)을 통해 조선에 입국하려다 실패함(3차 탐색 여행).
병오박해(丙午迫害)와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들음.
□ 1847년 초 :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가 이전된 홍콩에 도착.
1839년과 1846년의 박해로 순교한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
□ 7월 28일 :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라피에르(Lapierre) 함장이 이끄는 군함 글로와르(la Gloire) 호와 빅토리외즈(Victorieuse) 호를 타고 홍콩을 출발(4차 탐색 여행, 1차 해로 탐색).
□ 8월 10일 : 조선 고군산도(古群山島) 부근에서 난파하여 섬에 상륙. 조선에 남고자 하였으나 라피에르 함장이 이를 거절함.
□ 8월 26일 : 상해 도착. 이후 상해 서가회(徐家匯) 안에 있던 예수회 신학원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
□ 1849년 4월 15일 : 사백주일(卸白主日), 서가회 안의 대성당에서 예수회 회원이자 강남 대목구장인 마레스카(Maresca, 趙方濟)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됨.
□ 5월 :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중국 배를 타고 백령도(白翎島)를 통한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상해로 귀환(5차 탐색 여행, 2차 해로 탐색).
□ 1849년 5월 : 상해를 출발하여 요동으로 감. 요동의 차구(岔溝) 성당(현 장하시 용화산진)에서 사목 실습 시작
□ 6월 21일 : 차구 성당에서 만주의 부주교인 베르뇌(Berneux, 張敬一) 신부 앞에서 <중국 의례(儀禮) 의식>에 대한 선서를 한 뒤 보좌 신부로 성직 수행.
□ 11월 3일 : 요동으로 온 매스트르 신부를 만남.
□ 12월 말 :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봉황성 변문으로 가서 조선 입국을 시도(6차 탐색 여행).
매스트르 신부와 헤어져 단신으로 입국에 성공(13년 만에 귀국).
□ 1850년~1851년 : 전국의 다섯 개 도의 교우촌 순방
□ 1852년 8월 : 매스트르 신부, 고군산도를 거쳐 입국에 성공.
□ 1853년 여름~1854년 3월 : 진천 배티의 정주형 조선교구 신학교 교사 겸 지도 신부로 활동
□ 1854년 3월 이후 : 전국의 교우촌 순방
□ 1860년 : 죽림(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교우촌에서 경신박해(庚申迫害)를 당해 숨어 지냄.
□ 1861년 6월 15일 : 베르뇌 주교에게 보고차 상경 중 충북 진천 공소에서 장티푸스와 과로로 인해 푸르티에 신부로부터 종부 성사를 받고 선종.
□ 11월 초 : 충북 진천 공소에 가매장된 시신이 배론[舟論]으로 옮겨져 안장됨.
- 이전글최양업 신부의 편지 : 1-6번 째 (마닐라/소팔가자/심양/홍콩/상해에서) 19.03.2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