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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쿠뜨락/이태종 요한 신부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의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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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324회 작성일 21-09-07 08:50

본문

의탁 (양업 영성 따라 살기 3)

 

화를 참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아예 (화조차) 나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하려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매사에 포기가 빠를수록 화도 나지 않는단 말인가? 아니다. ‘의탁하며 살라는 말이다. 다 맡기고 살라는 얘기다. ‘양업 영성의 근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최신부님 영성의 뿌리는 십자가이다. 그러면 의탁이라는 두 글자는 그 둥치쯤 되려나.

 

대개 살면서 화가 나는 때가 언제일까? 남이 나를 너무 몰라줄 때도 화가 난다. 또 전개 상황이 뜻대로 되기는커녕 완전히 역행하면 속이 뒤집어진다. 그런데 최신부님이 당했던 상황을 보면 속이 뒤집히는 정도가 아니다. 사실 최양업은 하느님의 자비만을 철석같이 믿는 사람이다. 서한에 자주 나오는 “misericordiarum pater!” 자비로우신 아버지라는 라틴어가 잘 말해준다. 최양업의 하느님관()자비였다 그가 정의했던 하느님의 본성 역시 자비였다. 그런데 현실은 어땠는가? 무자비했다. 부친은 매 맞아 죽고, 모친은 칼 맞아 죽고, 핏덩이 막내는 옥중아사했고, 절친 대건이도 군부대 정문에 목이 걸렸고, 존경하는 모방신부님도 참수되었다. 그토록 은애하는 신자들이 매일 쫓기고 살육되는 지리멸렬한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자비하신 하느님관과 무자비한 현실의 갭에서 화가 나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최신부님은 이럴 때 바로 하느님 자비의 등식을 대입한다. 하느님은 자비하시니 미구에 더 좋게 해주실 것이다. 지금 마이너스인 만큼 잠시 후 플러스해주실 것이다. 왜냐면 본성이 이율배반되면 존재할 수 없으니까, 자비이신 하느님께서는 머잖아 반드시 훨씬 좋게 해주실 거라며, “서운한 마음에조차 빠지지 않으셨다. 우리의 바보 최신부님은 길 위에 스러질 때까지 이것 하나만 단순히 믿으신 분이다.

 

그런데 이 바보 같으신 믿음이 주는 모범이 하나 있다. 화를 원천봉쇄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평정을 유지했다. 만사를 모두 아시는 하느님께서 자비로운 아버지이시니 조급해질 이유가 무엇이랴? 또 사람이 나 몰라 준다고 섭섭해질 일도 없다. 저절로 온유라는 열매가 맺어졌다.

 

포기하고 살면 쉬운데 포기가 안 돼서 화가 나는 걸까? 그렇다면 또 포기(하느님의 자비에 내어 맡기는) ‘의탁과는 무엇이 다른가? 어째 포기는 피동적인 거 같다. “모르겠다! 에라 될 대로 되라.”는 식이다. ‘의탁은 주동적인 데가 있다. “모르겠다! 그렇지만 자비하시니 그 뜻에 내어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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