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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쿠뜨락/이태종 요한 신부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길 위에서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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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398회 작성일 21-08-18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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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9

 

그 수도자는 이렇게 나를 소개했다.

이신부님은 최양업 신부님한테 미쳤어.”

아니요, 아직 덜 미쳐서 여태 미치지를 못했슈.”

미쳐야 미칠 수 있는데 그 경지에 닿지 못했다고 했다. 그럴 때, 순간적이나마 27년 사제 생활을 돌아보게 되었다. 절반이 넘는 시간을 최신부님과 동행했다.

 

운명적이라고 수다를 늘어놓을 수도 있다. 현재 파견지인 중국의 차쿠가 최신부님의 첫 사목지이기 때문이다. 최신부님은 차쿠에서 중국인을 사목하던 중 조선에 입국하셨는데, 늘 길에서 움직이다 장마철과 혹한기만은 장기 체류를 하셨다. 그곳이 진천 배티이다. 이렇게 배티를 사제관의 형태로 본다면 최신부님은 차쿠에서 배티로 인사이동 된 셈이다. 그런데 나 역시 배티 인근 출신이다. 까마득한 후배가 170년 된 길을 쫓아, 감히 차쿠의 교환신부로 살고 있다 해도 영 틀린 말은 아니다.

 

실은 이런 말을 꺼내기에 눈치가 보인다. 지난봄 시복재판 기적심사 때에 좋은 결과를 보았어야 했다. 심사가 유보되었다고 할 때, 나 같은 사람이 더 열심히 기도했어야 했는데, 하며 금시 자괴감이 밀려왔다.


부족한 사람한테 왜 어울리지 않는 길을 걷게 하시는가?”


그것도 중국 교회를 오가며 여러 낯선 변수들에 맞닥뜨려야만 하는 길이다. 생소한 길인데도 누구 하나 잡고 물어볼 사람이 없다.

 

그러나 자괴감만 밀려온 것이 아니었다. 방어기제의 하나일까? 최신부님 덕분에 얻은 수확물 하나가 퍼뜩 생각났다. 최신부님의 대표 영성인 겸손함’, 그 하나만은 다행히 배우고 챙긴 티가 좀 난다. 예전에 얼마나 오만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지금 이 정도만 되어도 어디냐? 는 자화자찬 같은 위로이다. 어디 1등 하는 사람만 칭찬받으란 법이 있는가? 만날 50등 하다가 25등에 든 사람도 칭찬받을 만하다.

 

최신부님으로부터 얻은 선물이 또 있다. 불면증의 극복이다.

, 내일 아침은 일찍 일어나야 되는데...” 하던 날은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도대체 왜 이리 잠이 안 오는 거야?”

하며 다그칠수록 잠은 달아났다. 요즘은 다르게 생각한다. 최신부님은 매년 127개 공소를 다니느라 한 달에 눈 붙인 날이 4일밖에 안 된다는데... 잠 안 오면 묵주라도 돌리지, 하면 어느새 잠들곤 한다.

 

예수님도 모르겠다는 판국인데, 최양업 신부님한테 빠져 인생 다 보낼 거야?”

누가 이렇게 몰아세우더라도 어쩔 수 없다. 솔직히 예수님은 원래 우리랑 다른 존재였다는 핑계를 주고는 했다. 그러나 같은 한국말을 하고 우리 땅의 구석구석을 밟고 다닌 최신부님은 만만하다. 그토록 멋지고 우수한 분이 왜 길 위에서 살다 쓰러지셨을까? 왜 칠흑 같은 일상을 견디며 하느님을 믿었을까? 왜 쫓기면서까지 성무를 다하셨을까? 나에게 최양업은 피부에 닿는, 가까운 모범이다. 아직 숙제 거리로 남아있다. 여전히 닥쳐오는 현재이다. 여태 다 타지 않은 장작이다.

 

사실 최양업의 시복시성은 당사자에게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하다. 과거 어느 시대보다 풍요를 살면서도 감사의 생활을 모르는 2021년의 한국인들에게 필요하다. 일상의 모범이기 때문이다. 순교나 치명 같은 옛 얘기가 아닌, 매일 일어나는 희노애락의 증거자이기 때문이다. 박해의 산하를 12년 동안 다니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쁜 소식을!”을 외쳤던 일상생활 영성의 고수 최양업, 우리 쪽이 그의 다시 걸어나옴을 고대하는 것이다.

 

성 최양업이 오실 그 길 위에 먼저 나가, 서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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