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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쿠뜨락/이태종 요한 신부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기억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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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349회 작성일 21-08-18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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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상실

 

심상(心象)에 일렁이는 것이 아름다운 파동이기는 한데, 그것이 무엇인지, 어디서 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매년 6, 피정에 들어가 성가보다 정성껏 가곡을 흥얼거린 연유도, 기억의 편린보다 작은 그 신호같은 파동 때문이다.

 

모란꽃 피는 유월이 오면 또 한 송이의 꽃 나의 모란, 추억은 아름다워 밉도록 아름다워, 해마다 해마다 유월을 안고 피는 꽃, 또 한 송이의 (중략) 나의 모란


해를 거듭할수록 이 노래가 진지해졌다. 이유가 뭘까? 하긴 어릴 적 집 뒤꼍에 큼직한 모란이 피어나곤 했다. 꽃송이가 하도 짙붉어 뜨거운 불덩이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모란에 무슨 추억 얽힌 일이 없는데 왜 6월이면 아름다운 기억처럼 파동이 오는가? 뭉클한 그 물결은 예수성심대축일 미사에서 주여 나를 드리오니 온전히 받으소서. (중략) 성심의 사랑만이 가득한 그 안에, (중략) 거룩하신 당신 뜻을 순종하여 뫼시오리 라고, 성가로서 뜨겁게 화답해줘야 잦아들었다. 마음속 타오르던 모란 꽃잎도 그제야 함초롬해졌다. 그럴 때 모란꽃은 예수성심상에 그려진 가시 찔린 심장처럼 보였다. 색깔과 크기가 그랬다.

 

다음은 이겠다. 혹자가 말하기를 별은 하늘에 핀 꽃이라던가? 홀로였으나 외로운 밤은 아니었다. 방안에만 있지 못하게 하는 파동이 왔을 때, 필시 미지에서 오는 그 신호인가 싶었다. 가로등이나 인가의 불빛 같은 게 없는 데까지 가서 별빛을 보았다. 설렘으로 밤하늘을 보다가는 나름대로 정리되는 점이 있었다. “별은 달처럼 사람을 호리지 않아!” 다만 그의 존재를 잊고 살 때도 여전히 자리를 지켰노라고 깜박거릴 뿐, 별은 이내 어딘가를 향해 그저 방향만을 가리키고 있다. 별이 제시하는 방향은 꼭 모란꽃 필 무렵 쪽인 것 같다.

 

보다 먼저 꼽아야 할 게 사랑이리라! 나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도 있다. 무엇보다 현재 나에게는, 애써 사랑해야 할 대상이 있다. 그 사랑의 응답이란 것이 더디 돌아올 수밖에 없는 지역이요 상황이지만, 기다리며 사는 내 자세를 더 생각하기로 한다. 이렇듯, “사랑하는 이들이 먼저이다. “이나 에 앞서 사랑이 주는 신호야말로 그곳의 기억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마치 한 편의 드라마에서 (불의의 사고로 기억 상실에 걸린) 주인공이 기필코 찾아내는 기억의 단서처럼 사랑, , 별은 그곳을 떠오르게 한다.


, , 사랑, 이들보다 분명한 단서가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매일 발설하면서도 여태 확실히 알지 못하니 어찌하랴. “(중략)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미사는 정말 절반도 모르겠다. 그래서 조아린다. 제물이 된 절대자시라니...... 아직 어렴풋하기만 해, 삼가 두 손을 모을 뿐이다.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되었으니 아무튼, 천국에 대한 기억이 있으리라. 세상을 살다 보니 천국 기억 상실에 걸린 것뿐이라! 드라마의 주인공이 마침내 사랑의 기억을 찾고야 말 듯, 나도 주위에 있을 천국의 단서들을 쫓고 싶은 것이다. 사실, 이 예수성심성월에 나에게는 또 다른 천국의 단서가 있다. 615일 최양업 신부의 선종이 그것이다. 바오로 사도처럼 달릴 길을 다달렸기에 이제 다 이루었다.”고 할 만한 생의 마무리였다. 길 위에서 행복했던 사나이, 길 위에서 천국을 살던 사나이, 그의 길을 쫓다 보면 나의 천국도 두렷해지리라. 615, 최양업 신부님의 서거 당일만은 굳이 양업 성심이라고 불러 드리고 싶다. 예수성심과 양업성심 전에 심장같이 짙붉은 모란꽃을 하나씩 놓고 싶다. 그럴 때는 신호를 보내오는 그곳 천국이 덜 어렴풋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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