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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쿠뜨락/이태종 요한 신부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과속 딱지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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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422회 작성일 21-08-18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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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속 딱지 성찰

 

과속딱지가 날라 왔다. 어디서 찍혔나 봤더니 또 그곳카메라였다. 같은 곳에서의 같은 잘못이 창피해졌다. 과속에 대해 이렇게 부끄럽기는 처음이다. 돈도 무지 아까워지는 까닭은 낚시꾼에게 들은 한마디에서였다. “놔준 고기가 또 거기서 잡히네.”

 

혹시 과속딱지만 이런 게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을 더불어 사는 인생살이도 이런 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꼬리 물었다. 평소의 기질, 나의 말투, 선입관, 행동 양식이 때와 장소를 바꾸며 모습을 달리하지만, 어떤 신령한 카메라같은 것으로 본다면 똑같은 인과(因果)의 반복일 수 있겠다, 싶어 성찰 아닌 성찰을 하게 된다.

 

자기 성찰에 투철했던 문인이 구상 시인이다. 금관문화훈장을 받을 만큼의 명성에다 시단과 가톨릭계의 존경까지 두루 받았다. 시대의 양심이던 그가 작고했을 때 김수환 추기경은 장례미사에서 우리 사회를 끊임없이 깨우쳐주고, 나아갈 길을 알려주던 정신적 원로라고 했다. 노시인이 <임종 고백>이란 시를 썼다.


나는 한평생, 내가 나를/ 속이며 살아왔다./ 이는 내가 나를 마주하는 게/ 무엇보다도 두려워서였다./ 나의 한 치 마음 안에/ 천 길 벼랑처럼 드리운 수렁/ 그 바닥에 꿈틀거리는/ 흉물 같은 내 마음을/ (중략) 눈을 감거나 돌리고 살아왔다.

(중략) 보험이나 들 듯한 신앙생활도/ 모두가 진심과 진정이 결한/ 삶의 편의를 위한 겉치레로서/ 그 카멜레온과 같은 위장술에/ 스스로가 도취마저하여 왔다.


더구나 평생 시 쓴답시고/ 기어(技語) 조작에만 몰두했으니/ 아주 죄를 일삼고 살아왔달까?/ 그러나 이제 머지않아 나는/ 저승의 관문, 신령한 겨울 앞에서/ 저런 추악 망측한 나의 참모습과/ 마주해야 하니 이 일을 어쩌랴!/ 하느님, 맙소사!

 

과속 운전은 마땅히 구상 시인처럼 성찰해야겠지만, 그래도 교통신호는 잘 지켜왔다. 불가피하게 새벽 2시에 운전하게 될 때도, 인적 없는 신호등 앞에 어김없이 대기했다. 과속에만 흐물흐물 관대한 것이다. 20여 년 전, 어느 호젓한 국도 위에서도 그랬다. “이리 길도 잘해놓고 차도 잘 나가는데, 60킬로는 답답하지. 씽씽 가자.” 할 때, 저만치 앞에서 교통경찰이 차를 세웠다. 면허증의 사진을 보더니 , 신부님이네요?”할 때야 낯이 뜨거워졌다. 경찰관 쪽도 갑자기 머뭇거렸다. 그러더니 눈을 반짝이며 속삭여왔다. “신부님, 저 봉명동 신자인데요, 이번 주일을 빠졌어요. 과속 봐줄 테니 신부님도 미사 궐한 거... 우리 샘샘이 하쥬.” 나는 어느새 새벽 2, 혼자라도 신호등 지키는 얼굴이 되어 그게 그러면 안 되는 거요.”했다.


차쿠에서 닭장에 모이를 주는 일은 루시아 회장의 몫이다. 손수 키우던 닭은 잘 안 잡는데 한번은 부득이하게 그럴 일이 생겼다. 그런데 회장이 털 뽑는 작업을 닭장 옆에서 하는 게 아닌가? 닭들이 얼마나 똑똑한지 몇 시간을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그러나 저녁 모이를 주자 슬금슬금 또 살수(殺手)의 곁으로 모였다.

 

죄의 뿌리가 되는 칠죄종은 교만, 인색, 시기, 분노, 음욕, 탐식, 나태 이렇게 7가지이다. 여기에 하나를 보태 8죄종이라 부르고 싶다. 그 하나란 +반복이다. 시간대와 장소를 바꿔가며 매번 다른 인물을 통해서지만, 노시인이 말한 신령한 거울로 본다면 같은 지점의 반복일 수 있다. 습관이 된 버릇처럼 눈에 띄지 않는 잘못도 있다. 마치 자수의 뒷면만 보는 현재로서는 무슨 그림인지 알 수 없으나, 이다음 앞면을 보게 될 날에는, 하느님께 점수를 따고 반대로 점수를 잃어온 인생의 지점들이, 결국 거기서 거기였음을 알게 될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

 

과속딱지를 받던 날, 미사 때 바쳤던 영성체 후 기도가 아직 기억난다. “(중략) 저희가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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