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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쿠뜨락/이태종 요한 신부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길 위에서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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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447회 작성일 21-03-19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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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8

 

길을 떠난 이, 어서 집에 다다르길 바라기 마련이다. 집에 가 봤자 딱히 할 것도 없는데 길이 막히면 답답해진다.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니고 어디 놀러 갈 때도 마찬가지이다. 도착해서 막상 할 일이라고는 동승해 있는 사람들과 시간 보내는 일이 전부인데도 앞차가 느려터지면 추월을 나간다.

 

이름의 뜻이 굉장히 먼이란 굉원宏遠신부님이 있었다. 재작년 이맘때쯤 중국 심양의 주교좌 성당에서는 이분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교구 관할령의 중앙부에 위치한 심양에서 500600킬로 떨어져 있는 본당의 신부들조차 빠짐없이 새벽 5시 미사에 참석해 있었다. 성유축성미사 때도 안 보이던 얼굴들이 모두 나타났을 때 장엄한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교구장 배주교님의 강론 원고도 A4 용지로 5장이나 되었다. 그렇게 긴데도 언어장애인인 외국인의 귀에까지 쏙쏙 들어오는 걸 보면 돌아가신 노사제에 대한 회중의 마음이 대성당을 온통 달구고 있던 터였다.

 

기실 서굉원徐宏遠 신부는 우리 청주교구 황석두 루까 선교회에서 운영했던 요녕성 축가祝家 양로원에 계셨던 분이다. 자기 말로는 90세가 넘은 고령에도 양로원 미사 책임직을 맡았다고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기에 양로원 측에서 요양을 시켜드렸다고 봐야 맞다. 한국 신부인 나를 특히 좋아하셨는데 한국 남자는 모두 군대에 간다는 이유에서이다. 우리 둘이 만나면 병정놀이만 해도 시간이 부족했다. 19431945년동안 만주국의 군인이었다며 씩씩한 열병행진을 하다가 나에게 거수경례를 하면 웃음을 참고 진지하게 받아주는 거로 끝이었다. 백 마디 말보다 병정놀이를 반복하며 우리는 헤어졌고 또 만났다. 1923년 호로도箶蘆島시에서 출생한 그는 18살이 되는 1940년에 예수성심사도회에 입회하여 2년 후에 첫 서원을 했다. 수도사제가 되겠다는 그 길이 멀어지기 시작한 것은 이듬해인 1943년 만주국에 징병되었던 탓이다. 제대 후 북경 보인輔仁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이제 신학과정에만 몰두하려 했던 1951년도, 그의 수도회는 강제로 해산을 당한다. 집을 잃은 것이다. 할 수 없이 그는 1958년까지 허베이河北의 교회설립학교에서 생물교사를 맡는다. 그러던 중 당국에 밉보였는지 천진의 황화현 집단농장에서 6년 반의 노동교화를 했고, 1978년 고향인 요녕성에 돌아와 백마석 중학교에서 10년 동안 영어를 가르친다. 1988, 그의 나이 66세에 이르러 드디어, 심양신학교에 신입생으로 입학을 했다. 요녕교구의 전전임 교구장인 장화양張化良주교님은 이 66살짜리 신학생이 40년 가까이 보여준 교회에 대한 항구한 충성심과 학덕을 보고, 그해 1221일 부제와 사제서품을 연이어 집전하기로 결심한다. 18살에 떠난 사제 성소의 길이 66살에서야 일단 도착한 것이다.

 

장례미사 중 고인의 생애에 대해 강론했던 배주교님은 한 번도 중국 현대사의 격동기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외국인의 감으로도 서굉원 신부의 파란만장한 이력 자체가 현재까지 중국천주교회가 굽이굽이 걸어온 길모퉁이임을 금시 느낄 수 있었다. 요녕교구 사제단은 자신들을 대변하는 그 길의 목에서 이제 본향의 집을 향하려는 노 선배를 묵묵히 배웅하고 있었다. 어쨌든 故人66세의 나이로 새신부가 되자마자 청년처럼 일했다고 한다. 16년을 열정적으로 사목하다가 200482세의 나이로 은퇴하여 황석두 루까 선교회가 운영하는 축가 양로원에 왔을 때도, 아직 갈 길이 먼 사람처럼 보였다.

 

길을 나선 이, 어서어서 안정적인 집안에 도착하고 싶기 마련이다. 그 집이란 꼭 건축물만이 아니라 어떤 장소일 수 있고, 가족의 품일 수도 있다. 저금통장의 액수이거나 보장된 제도의 어떤 틀일 수 있다. 그렇다면 차쿠로 가는 길은 아직도 길 위에 있다. 여태 도정道程에 있는 한 나그네가 굉원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며 조금 안도의 숨을 내쉬어 보기로 한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 세상에 자기가 완전한 집에 당도해 있다고 안심만 해도 될 이, 역시 없질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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