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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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358회 작성일 21-03-19 08:44본문
사순 무렵
굳이 시적 대구와 운자로 어휘를 고른다면 지금까지의 내 인생은 소위 “당당”과 “허당” 사이를 오가며 살아온 시계추 같은 세월이다. 때로는 당당함이 지나쳐 우쭐거렸고, 때로는 ‘허당’같이 풀이 죽어, ‘좌 당당’ ‘우 허당’ 사이를 오갔다. 물론 무슨 일을 벌일 때 “주님의 뜻이다. 교회를 위해서이다.”라고 과대 포장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당당하고 싶은 속을 말끔히 비운 적도 없다.
이는, 그 뿌리가 깊다. 어릴 적 코흘리개가 공부했던 것도 우등상이 주는 당당함 때문이요, 냇가에서 놀다가 물고기라도 잡아 올 땐 보무가 당당했다. 운동장에서 공놀이하던 아이가 신학생, 부제로 성장하여 교구 대항전을 벌일 때도 마음의 뿌리는 당당한 데에 잇닿았다. 본당을 맡다가 중국행을 한 것도 솔직히 같은 연유가 섞였다. 장차 차쿠의 일이 잘되면 교구 안에서 당당하지 않을까, 하는 속내였다.
그렇지만 세상일이 뜻대로 되는가? 2016년 차쿠의 건축을 완공하고 한국 순례객 미사까지 허락받았을 때, 201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일’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드 미사일’이 한중관계를 냉각시켜버렸다. 이번 코로나도 마찬가지이다. 차쿠ㆍ백가점이 최양업ㆍ김대건의 공동사적지라, 탄생 200주년을 맞아 예약된 순례팀이 많았다. 그러나 코로나 때문에 차쿠에 가지도 못한 ‘허당’의 시간을 살고 있다.
그런데 또 대인관계로 볼 때는 너무 당당한 것보다 ‘허당’한 게 낫질 않은가? 인간관계의 꽃이라 볼 수 있는 부부지간이 그렇다고 한다. 가령, 남편이 평생 다른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유세가 대단한데, 이런 고자세보다 약점 잡혔더라도(큰 허물이 아닌 이상) 나긋나긋하고 ‘허당’스러운 스타일이 좋다고 들었다. 가보지도 못한 부부의 길을 가타부타하는 것은 나 역시 질러가는 ‘관계의 길’ 하나를 매일 가니, 하느님과의 동행이다. 어떤 때 나름 잘 살았다 여겨져 당당하다 못해 교만까지 오르니, 그로 말미암아 이내 ‘허당’에 떨어질 일이 생기고 만다. 어쨌든 하느님께서는 계속 겸손하라 하시는 것 같다. 그래야 뭔 일이 잘 안되어 허당에 떨어질 때, 높게 까불려져 흩어지던 정신을 낮게라도 응결시킬 수 있으니, 당당보다는 온당하라 하시는 듯하다.
최양업 신부님은 만사가 꼬여 힘들더라도 “우리가 분노의 그릇이 되지 말고 하느님 자비의 아들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침내 언젠가는 만나 뵙게 될 하느님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도 뵙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며 ‘허당’마저 지금 여기의 ‘꽃자리’로 여기라 말씀하신다.
제아무리 떵떵한 집안에 태어나 당당히 살아온 이라도 한번은 떨어져야 할 허당의 구렁이 있다. 죽음이다. 죽음에 대해 <인생피정>이라는 책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죽기 전에 죽으면, 죽을 때 죽지 않는다.”
벌써 사순절 무렵이다. 이번 수요일에 재를 바르는 예식도 이다음 “한 줌의 재가 되기 전에 미리 재가 되어, 재가 될 때 정녕 재로 끝나지는 말잔 뜻이 아닌가? 지금 이 말은 내 귀에 이렇게도 들린다. “당당할 때 허당할 줄 알면, 허당에 떨어질 때 당당함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늘 당당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허당 구렁이 있다. 그게 인생의 진실이라고 말해오는 사순절에게 나도 이제 좌당당 우허당하지 않고, 그사이에 있을 천당에만 관심이 있다고 대답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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