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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쿠뜨락/이태종 요한 신부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따뜻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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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426회 작성일 20-12-23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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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함에 대하여

 

소한에서 대한으로 가는 가장 추운 겨울이다. 바깥 날씨가 이러하니 뭔가 따뜻한 게 생각나는 때이다. 꼭 물리적인 온도를 말함이 아니다. 체감體感보다는 굳이 마음으로 따뜻한 심감心感 온도이겠다.

따뜻함에 대한 기억 속에 공소公所라는 두 글자를 빼놓을 수 없다. 공소지역에서 나고 자란 나는 매일 미사에 참여할 수 없었다. 주일도 공소예절로 대신했다. 그러다가 성탄 무렵이나 한겨울이 오면 본당에서 신부님이 나오셨다. 한참 선배들 얘기로는 아예 숙식하셨다는데, 우리 때만 해도 읍에서 출퇴근했다. 공소에 신부님이 오시면 잔치가 벌어졌다. 이삼일씩 벌여도 누구 하나 찡그리는 사람이 없었다. 농한기라 어른들이 한가로웠고, 우리 아이들이야 방학 중이라 마침 잘 되었다. 우르르 그냥 공소 마당을 몰려다니다 밥 먹으라고 할 때만 앉으면 되었다. 아무렇게나 쭈그려서 씹지도 않고 후르륵 마셨던 국수, 김치국, 수제비, 콩나물국밥, 떡국 등이 4050년이 지나도록 뜨끈뜨끈한 맛으로 감쳐온다. 곁눈으로는 연방 못 보던 사람들을 힐긋거렸었다. 대체 어디서 이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나. 박해시대부터 근방 12 골짜기가 교우촌이라더니 이 골 저 골에서 다 나와 한바탕 잔치를 벌였다. 아이는 그 북적거림이 좋았다. 경당에서 온종일 묵주기도 소리가 나고, 맨 앞의 제단에서부터 맨 뒤 출입구까지 늘어선 판공성사의 행렬. 그렇게 북적이는 데도 흐트러지지 않음. 가족이라는 범위를 넘었는데도 한마음들이니, 이런 여러 가지가 합쳐져서 따뜻함만으로 아로새겨졌다.

아주 예전에는, 공소가 공적인 건물이라기보다 공적인 모임으로 통용되었던 거 같다. 사제가 성사를 집전하는 회동’. 그래서 공소를 차린다, 공소를 본다, 공소를 열어 공소를 치른다, 공소 날짜를 받는다, 정한다, 공소를 시작한다, 라고 쓰였다. 이러한 공소들의 따뜻한 분위기에 대해서라면 단연, 최양업 신부님의 편지 중에 그 백미가 있는 줄 안다. 공소가 끝날 때의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제가 공소를 떠나려고 겉옷을 입을 때부터 공소 전체가 울음바다가 되고, 탄식 소리로 진동합니다. 어떤 사람은 저를 못 떠나게 하려는 듯 옷소매를 붙잡고, 애정의 표시로 눈물을 적십니다. 그들은 저를 계속 따라나서서, 제가 멀리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며 돌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땐 좀 더 오랫동안 제모습을 지켜보려고 야산 등성이에 올라가기도 합니다.”

글쎄, 최신부님은 끝내 그 바쁜 길을 되돌아가 또 일일이 강복해주셨을 것이다. 신앙만이 가진 모든 것이었다. 신앙 외에는 나눌 것도 없었다. 그래서 서로에게 전부였다. 순도 100의 마음만 주고받던 피차간. 사제는 신자들의 열심을 보고 사목적 불꽃을 내었고, 신자는 사제의 열정을 보고 영혼구령에의 불길을 활활 지펴 올렸다.

 

군난窘難 때가 육신적으론 군색했다 할지라도 영신적으로는 뜨거워 보인다. 서로에게 따뜻했다. 이런 점에서 작금의 코로나가 박해보다도 어려운 상대이질 않은가, 라는 생각도 하게 만든다. 아무튼 유년 시절 공소에서 자란 나는 미사성제와의 합심 기도만 우렁차게 바치며, 한겨울의 따뜻한 미사를 기다렸다. 또 앞으로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내게 만일 미사를 할 수 없는 지경이 닥친다면 신영성체의 기도를 뜨겁게 바칠 것이다. 살아계신 성체의 따뜻함을 심감하며, 결코 지치거나 식지는 않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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