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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쿠뜨락/이태종 요한 신부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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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430회 작성일 20-09-25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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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에

 

의 창작 에너지가 영감이라면 소설의 창작 에너지는 광기라고 한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몇 년을 태워도 타지 않는 연료가 필요한데, 그것은 작가가 죽을 때 죽더라도 이것 만은 세상에 외쳐야겠다는 광기, 그 응축 덩어리를 장기간 거미줄처럼 뽑아 쓰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 소설사에서 최 장편소설은 <토지>이다. 박경리 작가는 총 20권가량(출판사 별로 권 수가 다름)26년간 고질과 투병하며 완필했다. 그러면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단다. 대단원의 마침표를 찍고 하동에 내려가 토지 문학관을 개막할 때야 왈칵 터져버렸다. 링거를 몇 개나 꼽고 숱한 밤을 새우면서도 버텼는데 , 내가 왜 이러지? 나의 어느 구석에 고였던 눈물일꼬?”를 살펴보니, 그건 장편을 써내게 한 힘이요 창작 동기이기도 했다. 일을 마치고 나서야 안 동력(광기)의 정체는 바로 서러움, 인간으로 빚어져 인간의 숨을 이어가는 서러움덩어리였다고 한다. 그 서러움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혹, 불완전하고 나약한 인간성, 이마저도 생로병사라는 굴레에 매인 인생의 멍에를 뜻하는 게 아닐까, 나름 짐작했다.

 

왜 갑자기 특정 작가가 풀어낸 인간 생명의 굴레, 멍에타령이냐면, 지난봄에 차쿠로 가지 못하고 멍에목 성지로 왔었는데, 이 가을에 또 오게 되어서이다. 지명이 꼭 멍에목이라서가 아니라, 개선되지 않는 이 코로나야말로 작금, 인류가 짊어지고 있는 멍에가 아닐까 해서이다. 정말, 가까이서 멀리서 악전고투하시는 업계를 보면 이내 서럽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문학작품 중 이 인간의 조건이 꼭 멍에로만 표현된 건 아니다. 인간이 신들과 경합하는 그리스 신화에서는 유한한 생명마저 당당하다. 신들의 무한한 지속보다 모든 것에 이 있는 인간의 시간이 매 순간 더 아름답다고 한다. 그 명멸하는 빛 앞에서, 오히려 신들이 인간을 질투한다, 는 영화 <트로이>의 대사가 있다. 그리스 대문호 중에 인간의 숨을 서럽지 않게 묘사한 이도 있다. 도리어 신들이여, 당신은 아파보았소? 늙어보았소? 마지막 애타는 이 사랑을 아시는가?”라며 주장한다.

암만 그래도 인간 생명 안에 깃든 서러움은 깊게 실재하는 법이다. 어떤 때는 남들 때문에 어떤 때는 자신 때문에, 한숨이 나오고 눈물도 나온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는 말씀처럼 이웃을 대하고 싶지만, 사흘이 못가서 불완전성을 실토하게 된다. 또 자기 마음 하나 만족하지 못하고 살다가, 내 마음이라도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는 타고난 나약성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래저래 인생이 멍에이다. 그래서 그런가? 멍에목 담임 신부는 늘 이런 멘트로 미사를 시작한다. “멍에목에 오셨으니 크고 작은 삶의 멍엘랑 이 제대 앞에 내려놓으시라.” 만날 하는 레퍼토리인데 만날 감동하는 걸 보면 참 우리네 삶의 멍에도 각양각색인가 보다. 근데 언젠가부터 나는 속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다. “에이, 김신부님은 원래 부지런하니깐 멍에를 내려놔도 되지요. 만약, 예전 시골의 일 소가 멍에를 내려놓으면 어찌 되나? 바로 푸줏간이지. 송아지 잘 낳아가며 주인네와 오래오래 식구처럼 살려면, 멍에를 성실히 져야지......”

그리고 유독 멍에목 미사 때만 떠오르는 말씀도 있다. “멍에도 나무이고 십자가도 나무이질 않는가? 둘 다 엇비슷한 숙명이질 않는가? 그렇다면 십자가를 잘 지면 부활로 가듯이, 굴레를 벗어날 길은 삶의 멍에를 잘 지는 건지도 몰라.”

오늘같이 소설 <토지>를 운운한 날은 타계한 여류작가의 음성도 들리는 듯하다. “저 역시 당황했던 내 눈물을 들여다보니, 그건 인간 생명으로서의 서러움이었습니다. 난 그 서러움을 태웠습니다. 서러움을 팔았고요. 그리하여 일을 완수했습니다.”

부디 코로나가 다 지나갔을 때 코로나 멍에를 잘 졌다고 말했으면 좋겠다. “코로나 서러움으로 잘 씻겨져서 오히려 정화되었고, 이제 인간의 숨보다는 성령의 들숨 날숨으로 더 쉰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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