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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쿠뜨락/이태종 요한 신부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지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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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392회 작성일 20-09-25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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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전

 

후덥지근한 여름을 벗어나는 끝도 상큼하지만은 않다. 올가을의 문턱은 계절이 갈마드는 운치도 없다. 한마디로 지친다. 지쳐 보인다. 전면전쟁이라도 단기전이라면 좀 나을 텐데 벌써 8개월째 방역, 격리, 확진자, 불경기, 마스크 같은 것들에 끌려다니니, 푸른 저 가을 창공 아래라도 이내 좋다가 말곤 한다.

 

그래도 9, 순교자 성월이라 그런가? 지구전의 양상이 된 이 코로나처럼 160년 전의 박해를 견디셨던 선조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당시 조선의 조정은 천주교 탄압의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물론 득세한 정치 당파가 아직 관대한 성향을 보였지만) 전국적인 체포령이 아니라 천천히 고사시키는 쪽으로, 어쩌면 진화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첫째 이유로 신유, 기해, 병오 대박해 후에 천주교의 인기가 되려 급상승한 것이다. 한 명의 지고지순한 피가 뿌려진 땅에 수십 수백의 예비자 신앙이 발아했으니, 조정에서도 작전 변경이 불가피했을 터다. 둘째로, 도대체 그 많은 신자들을 다 붙잡아다 가둘 감옥이 부족했다. 그래서 찾아낸 효과적인 박해의 수단이란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한마디만 던지면 되었다. “천주교 신자의 재산은 빼앗아도 되고, 주인 없는 아녀자는 납치해도 된다.” 이 한마디에 실제 웬만한 양민들까지 천주교를 박멸하기 위해 눈 벌겋게 무장되었다고 한다. 최양업 신부님도 마지막 편지에서 지구전이 된 이런 박해가 더 힘들다고 하신다.

르그레즈와 스승님, 조정에서는 깊은 산골짜기에 꼭꼭 숨어 사는 천주교 신자들을 모두 체포할 뜻이 없어 보입니다. 그 대신, 중앙의 포졸을 전국 순회시키며 주민들을 선동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박해 방법이 우리에게는 더 가혹하고 훨씬 더 치명적입니다. 주민들의 충동에 일상의 생활이 혼란스러워지고, 천주교의 인기도 뚝 떨어집니다.” 이 열아홉 번째 편지는, 한 번의 영웅적인 순교보다 언제 끝날 줄 모르는 멸시와 천대, 서러움 하나하나를 잘 견디는 쪽이 더 노고가 된다는 투이다.

 

전공이 교부학이고 현재 신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한다는 모 신부님과 얼마 전 담소한 적이 있다. 잠깐이었지만 잊지 못할 얘기들을 나누었다. 자기가 요즘 순교 교부들의 문헌에 빠져 있는데 흥미롭다는 거였다. 1600년 이상 된 서양인 순교 조사서의 문장이랑 우리나라 순교자들의 기록이 글자까지 동일하다는 것이다. 정말 주어(순교자 이름)를 서로 바꾸면 동서양과 고금을 막론하고, 남녀노소의 사료史料까지 누구의 내용인지 모를 정도로 똑같다는 거다. 그러면서 사료의 문장이 같아진 이유를 나름대로 분석했는데, 두 개의 키워드가 같아서는 동일 순교 행위일 수밖에 없어서, 라고 했다. 하나의 키워드는 예수님이고 나머지는 십자가이다. 이 두 개의 키워드를 기둥 삼아 쌓아 올린 순교 기록인지라, 서양과 동양의 문장이 같다는 것이다. 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이게 정말 일리가 있다면, 그 주어(순교자 이름)에 지금, 여기에, 있는 내 이름을 넣으면 현재 진행형도 되겠네.”

 

그렇다면 나는 순교를 할 수 있을까?” 매년 순교자 성월이 오면 자문해보기도 했던 문제다. 지금 돌이켜보면 좀 유치하다. 이렇게 물어야 더 세련될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예수님 때문에 세상의 무엇을, 얼마만큼까지 버릴 수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예수님 때문에 얼마만큼 멸시(십자가)와 천대를 달게 받을 수 있나?” 어차피 코로나도 장기전이 되었고 그 속에 사는 신앙 행위 역시 지구전이 되었으니, 일상에서 쓰는 말로 자문해봄이 옳을 듯하다. 사실 순교의 과정도 지구전이었다. 하루아침에 치명하신 분들이란 없다. 치명하기 벌써 오래전부터 순교의 길에 들어선 분들이다. 문중에서 호적을 파낸다고 했을 때, 고래등 같은 집과 문전옥답을 버리고 야반도주할 때, 산속에서조차 근처 주민에게 늘 불이익을 당할 때, 체포되어 무시무시한 고문을 받을 때, 선조들의 목숨줄 역시 조금씩 조금씩 끊겨 갔다. 마지막에 생명 하나 달랑 남았을 때 그마저 봉헌할 적엔 나 같은 사람이 하는 것보다 훨씬 수월했을 터이다. 한걸음에 백 계단을 오르는 게 아니라, 아흔아홉 계단을 차근차근 다한 후에 백번째로 올라서는 거라면, 일단 오늘 하루 오를 계단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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