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차쿠뜨락/이태종 요한 신부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벽과 함께

페이지 정보

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374회 작성일 20-08-27 18:07

본문

벽과 함께

 

애초 눈에 들어온 꽃은 맥문동이었는데 그 보랏빛이 사순절 색깔 같아서는 머뭇거렸다. 또 어차피 장난삼아 시작한 바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망초 꽃도 괜찮았다. 얼추 마가렛만 한 것만 골라 꺾으면 그것도 좋았다. 그러던 중 오가던 길목에서 봤던 동네 꽃집이 생각난 것이다. 손님도 없는데 문 앞에까지 형형색색으로 진열해 놓은 꽃들이 신경 쓰였다. 공짜로 향기를 들이쉬며 지나칠 때는 간판이라도 힐긋 보아 주었다.

꽃다발은 누구에게 줄 건가요?”

어머니요.”

어르신들은 화려한 색이 좋지요. 이 핑크 장미 어때요?”

라고 묻는 꽃집 주인에게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요양원에 계신다. 5년 전 뇌염에 걸려 죽다 살아나신 후에는 거동이 불편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문 시설에 계신 게 본인의 자존심을 덜 상하게 할 것 같아 성심노인요양원의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요양원은 퍽 가정적인 분위기였다. 노인들을 따뜻이 돌보는 직원분들을 보면 머리가 숙여졌다. 재작년 겨울만 해도 어떤 할머니가 핏기없는 얼굴에 주르르 콧물을 흘리셨다. 그러자 너무나 자연스럽게 한 직원이 옷 소매를 걷어 올리는 거였다. 뽀얀 팔뚝으로 쓱쓱 콧물을 닦아주는데 어느 모녀지간보다 다정해 보였다.

엄마, 이 장미 다발 이쁘지?”

우리 어머니! 십 년 전 내가 중국에 다시 가고 싶다고 했을 때는 건강한 목소리로

그려 신부님, 중국에 가셔! 뜻한 걸 이뤄야지. 어디서든 사제답게 사는 게 엄마한텐 효도 하는 겨.”

하셨다. 그랬던 분이 저리 몸과 마음이 쇠약해져서

그래, 한국에는 언제 아주 들어오는 겨?”

라는 말만 되풀이하신다. 거기다 가끔

중국이 좋은 가벼?”

하고 토를 다실 때는 아무리 그럴듯한 말을 준비해도 소용이 없다. 얘기 끝에는 여지없이 똑같은 질문이시다. 천진무구함에다 앵무새 같은 억양이 주무기이다.

코로나 19는 이런 모자의 만남마저 방해하고 나왔다. ‘노인 요양원 방역 지침에 따라 면회자가 시설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둘 사이에 유리벽이 생겼다. 닫힌 강화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어머니는 안에서, 아들은 밖에서 마주할 뿐이다. 휴대폰을 걸어 스피커 상태로 몇 마디 나눠보지만 직접 대면보다 밋밋하고 영 싱겁다. 어깨를 주물러 드릴 수도 없고, 물 한 잔을 나눠 마실 수도 없다. 자칫 어색해질 수도 있겠다 싶어 잔머리로 찾아낸 방책이 이 꽃다발인 셈이다.

엄마 이거 제일 이쁜 거로 사온 거요.”

하며 꽃다발을 흔들었더니 유리벽 너머로 노모 역시 흔들리신다. 보시라는 꽃은 아니 보고 아들 얼굴에만 고정된 눈동자가 흔들린다. 흔들리며 환하게 꽃 피어나신다.

워째? 고마우면 노래 하나 불러 주시지!”

그러자, 아니 부를 것 같던 어머니가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하고 노래하는데 아들은 더 이상 스피커 폰 소리가 아니었으면 했다. 조금 옆으로 가서 거기 0.01센치라도 있든 말든 문틈에 귀를 대고 어머니를 응시했다. 점점 노랫소리는 작아지고 점점 눈빛은 강렬해진다. 모자가 그렇게 눈만 주고받을 때는 이 유리벽이라는 것이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았다.

 

유리벽 너머로나마 어머니를 뵙고 돌아설 때 아들의 마음에 이런 말이 솟았다.

감사합니다. 이렇게라도 뵐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또 그 곁으로는 에누리 없는 말투도 떠올랐다.

효도? 그거 다 자녀들이 행복하자고 하는 거지. 효도도 안 하고, 다 안 하고, 다 없으면 인생의 시간, 또 뭐를 하리오?’

효도할 수 있는 대상의 존재와 또 언젠간 맞이하게 될 어머니의 부재 사이를 오락가락하던 생각은 불쑥, 흠숭의 대상인 하느님에게까지 달음박질한다.

하느님께도 마찬가지지. 하느님을 아예 잃어 봐야지, 생애 디디고 사는 터를 세상이 알게 되려나?’

몇 걸음 더 가면서는 요리조리 궁리도 하게 된다.

그리고 참! 코로나라는 벽 너머로라도 하느님 잘 만나게 해줄 수 있는 방책은 없을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