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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쿠뜨락/이태종 요한 신부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집보다 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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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377회 작성일 20-05-19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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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보다 더 집

 

만만하던 동창에게 제대로 말 펀치를 맞은 적이 있다.

작은 폐교 하나가 있는데 느티나무가 아주 그림여! 은퇴하고 살 집터를 미리 사 놓는 게 어뗘?” 그랬더니, 무슨 돈으로? 하는 빛이 무심히 돌다가 ? 세상에서 영원히 살려고?”라 답할 때는 바로 꼬리를 내려야 했다.


벌써 십수 년이 지났는데 다시 화끈해지는 바람에 애꿎은 자동차 핸들이나 움켜쥐게 된다. 삼ㆍ가ㆍ터ㆍ널ㆍ 보은 속리산 자락의 한 터널을 지나면서 참말, 터널 한 번 생각보다 길구나, 하는 혼잣말을 했다. 컴컴한 어둠 속이라 그럴까? 머릿속은 금시 작금 모든 인류가 겪고 있는 길고 긴 코로나 터널이라는 데까지 이어지게 된다.

 

, 그래도 우리 대한민국! 한 점 빛으로 커오는 밝아오는 터널의 출구처럼 희망적이다. 선방하고 있다. 그의 일등공신으로 혹자는 민주적 시민의 역량, 하자는 투명한 행정, 무엇보다 헌신적이고 선진적인 의료자산 등을 꼽지만, 나는 뜬금없이 눈총이란 거를 꼽고 싶다. 같은 단일 민족끼리에서나, 한동네 이웃사촌 사이에서나 발사되고, 엄청 따가울 수 있는 눈총을 언급하고 싶은 거다. 제아무리 강제력 있는 법 집행보다, 내부적으로 구속력이 있는 단일 민족끼리에서의, 한집 식구 같은 사이에서의 눈총”! 이야말로 아예 보이지도 않은 대바이러스 전에서 대공감이란 방어선을 구축했다. 디테일하게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라 눈치를 주더니 이윽고 배려로서의 거리 두기경계를 넘나들 땐 눈총이 아닌 (으로도) (만한 사랑)”으로 까지 들릴 정도였다.

 

드디어, 터널이 끝나고 손에 잡힐 듯 구병산九屛山이 들어온다. 신세계이다. 아홉 개의 병풍으로 쳐진 겹겹산, 기실 사오월의 산등성에서는 꼭 초록이 동색만은 아니다. 같은 초록이라도 진초록, 연초록, 여태 남은 희거나 분홍빛 일렁이는 아련한 것들, 한 폭의 수채화가 따로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고울 저 신록이 와락 품까지 안겨들지 못하는 연고는 무엇인고? 터널은 길로 이어지니, 또 만방으로 통할 것이니... 전 세계를 덮고 있는 코로나의 어둠이 아직 가늠조차 하기 어려운 탓이라. 차쿠 신부 역시 길이 막혀 최양업 신부님이 매년 순방했던 멍에목 성지로나 향하고 있는 까닭이다.

 

멍에목은 최양업 신부님의 여덟 번째 편지에 나온다. 당시 조씨라는 지체 높은 양반이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은 멍에목의 집들이 하룻밤 새 불타버린 사건이 아니었다. 세상의 막다른 고개 위에 간신한 집을 짓고 동네를 꾸렸던 주민들, 전소한 제집의 잿더미 앞에서도 태연했던 그 낯빛들이었다. 신통치 않은 답변에 견딜 수 없어 꼬치꼬치 캐묻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실토를 듣게 된다. 다들 천주교 신자인데, 자기들은 좋은 일도 궂은일도 모두 참으로 좋으신 하느님께로부터 일어나는 것으로 믿는다는 거였다. 그렇기에 늘 평온할 수 있다는 몇 마디는 조씨에게 커다란 감동의 빛을 준다. 급기야 바오로라는 세례명으로 신자가 되고, 자기가 살던 고향으로 돌아간다. 곧장 자기 집을 불사르기에 이른다. 천상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하기 위해 지상 집을 불태워버렸을 때, 그 발걸음에 힘이 실리지 않았을까? 어쨌든 조씨는 자기 발로 찾아와 꼬치꼬치 캐물었고 바오로가 되었다. 또 자청해서 열정적인 선교사까지 된다.

 

코로나 때문에 부활절에도 하지 못했던 본당의 회중 미사들이 부활해 가고 있다. 첫 주부터 당장 정상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희끗희끗하던 산등성이가 연두를 내고 초록이 되어 농음을 드리우듯, 정한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당장부터 분명한 한 가지는 있다. 우리네의 몸과 마음은 자연히 집으로 향한다는 것이다. 거기 안전한 피신처가 있고, 반겨 주는 가족이 있어서이다. 그런데 가령 집보다 더 편안하다고 치자. 집보다 더 반겨준다고 치자. 집보다 집 같아 혈연보다 더 의연한 빛이 비친다고 쳐보자. 그게 어떤 곳이고 어떤 시간이고 어떤 상황이고 상관이 없다. 우리네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그리로 향할 것이다. 얼과 넋이 스르륵 깃들고 싶을 거다. 그렇기에 우리 본당공동체에 한여름 신록이 이내 무성해질 거란 이야기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관계 단절의 주범이었던 코로나19 탓에 지구촌이 하나의 집이라는 의식은 배가되어 버렸다. 언제까지나 제나라 제집 빗장만 걸어 잠글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매일 하는 기도의 범위가 넓어지고 말았다. “일상생활의 순교 모범이신 가경자 사제 최양업 토마스, 전 세계의 코로나 조기종식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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