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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쿠뜨락/이태종 요한 신부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자존심, 자존감 / 이태종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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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377회 작성일 20-03-17 18:22

본문

자존심, 자존감

 

속담이랄지 격언이랄지 무릇 은 알리라.”는 말이 있다. 그래야 약이 먼 데서도 듣고 처방하러 오지 않겠느냐는 선조들의 지혜이다. 어제 중국 우한의 당서기 마궈창은 급기야 이번 신종 폐렴 발병을 제 때에 알리지 않았다며 자책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이 소리는 사실 예견되었다.

 

과거에 나 역시 병을 알리지 않은 적이 있다. 팔팔 쌩쌩 괄괄하던 아직은 삼십 대 일 때, 무릎이 아파 정형외과에 갔더니 최헌식 박사는 껄껄 웃기만 했다. 십자인대가 끊어져 오그라들려면 몇 년은 아팠을 텐데, 이 곰탱이야 병만 키웠냐? 라고 질책하는 웃음 같았다. 당시 몸 담고 있는 본당에는 휴가만 간다고 했다. 수술과 물리치료까지 마치고 복귀했을 때도 일언반구를 하지 않았다. 수술한 자리의 통증이 남았는데도 안 아픈 척하느라고 참말로 고생도 생고생! 지 신세를 지가 달달 볶았었다.


모 일간지의 베이징 총국장 유상철씨도 언급했지만 예부터 중국은 황제에게 잘 보이려고 기쁜 일은 알리고, 근심은 보고하지 않는(報喜不報憂)’ 관료주의가 성행했다. 하기야 대륙 각지의 걱정을 다 챙긴다는 게 어렵기도 했을 거다. 그런데 이 관행이 민간에까지 퍼져버린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에게 니하오? (좋으시지요?)”라고 인사하면 열의 아홉은 하이하오! 還好! (아직 좋아요!)”라고 화답한다. 이게 아주 인사법이 되었다. 보기에는 다 죽게 생겼는데도 여전히 입버릇처럼 還好라고 한다.

 

서른의 아홉수였던 그 시절, 나는 왜 병을 알리지 않았을까? 한마디로 강해 보이려고 그랬다. 약점을 내보이기가 싫었다. 누군가 내 병을 가지고 쑥덕거리며 입방아 찧을 걸 생각하니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 지금 생각해도 그때는 내 교만의 절정기였다. 그러면 중국은 왜 바로 병을 알리지 않았을까? (차쿠 같은 데서는 우한 소식을 한국 뉴스를 보고야 알았으니) 이 역시 강한 국가이고 싶어서 그랬을 거다.

중국의 세간에 정치 지도자를 평가하는 표현이 하나 있다. 接地氣兒 : (식물이) ‘흙냄새를 맡았다’, 라고 하면 그의 정치가 백성들 안에 뿌리를 내렸다는 칭찬이 된다. 반대로 高高在上 : 붕붕 떠 있다, 라고 하면 조롱하는 말투가 된다. 가뜩이나 중앙의 정책에 대해 지방의 보여주기식 전시행정 대책이 만연해 있는데, 작년은 특히 건국 70주년 되는 해가 아니었던가. 깃발들이 높게 붕붕 날린 만큼, 구호들이 강하고 또 강하게 외쳐진 만큼 상대적으로 실생활이라는 땅에 뿌리내리진 못했으리라. 이건 중국에 5년 산 사람이라면 그냥 체득할 수 있는 2019년 한해의 분위기였다. 나날이 향상되고 세련되어 가는 백성의 의식수준에 맞춰 뿌리내리지 못한 70주년 전시행정이, 그의 연말에, 그야말로 보이지도 않는 적을 딱 만난 것이다. 듣도 보도 못한 신종 출몰을! 그러니 초전부터 고전을 면치 못함은 예견된 일이다.

 

마침 비자의 기한이 차서 귀국하였고, 주님 봉헌 축일미사를 드리면서 나는 중국에 대한 첫마음을 재차 봉헌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런저런 리스크를 염두에 두었던 당초 중국행이 아니었던가, 하고...) 그만큼 현재의 상항이 위중해 보인다. 혼자 드리는 미사라서 보편지향기도는 자연스럽게 중국 쪽으로 향해진다.

첫 번째 교회를 위하여에서는 지금 굳게 막혀버린 성당 안에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볼 신부들, 중국교회가 생각났다.


두 번째, ‘위정자를 위하여에서는 별의별 욕심이 다 났다. “보도하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라, 보도하지 않는 것이 두렵다.”고 하는 다수의 여론 앞에, 중국의 위정자들도 투명하게 병을 알렸으면 좋겠다. 또 군인들이 아무리 길을 막고 대문을 막아봐도 인력으로는 힘든 일이라며 허리를 굽혀, 백성들의 진심을 구해보면 어떨까? 이참에 인간의 힘이 쌓아 올린 바벨탑에 아니라 백성들이 그토록 믿고 의지하는 그 하늘대전에 두 손 모으고 같이 무릎 꿇는 기회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이게 비록 자존심은 떨어뜨릴지언정 자기 신세 자기가 볶는 데서 오는 무게는 내려놓을 수 있을 텐데...


세 번째,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에서는 봉쇄된 도시에, 건물 안에, 확진의 공포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네 번째, ‘공동체를 위해에서는 느닷없이 고린토 후서 129절이 생각났다. “나는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라고 하신 바오로 사도, 대체 사도의 자존감은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이기에 병을 알리고, 약점을 자랑하고, 자존심을 땅바닥에 떨어뜨려도, 푸릇푸릇 싹처럼 돋아나고야 마는 자존감이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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