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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쿠뜨락/이태종 요한 신부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길 위에서 3 / 이태종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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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383회 작성일 20-01-12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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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3 / 이태종 신부 


‘넌 왜 나만 보면 맨날 우거지상이니?’

라고 한마디 해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러나 혹시 아닐 수도 있다. (시각은 빛의 속도라니까) 부지불식간 내가 먼저 그에게 레이저를 쏘아댄 것일 수도 있다. 


집이 3개(차쿠, 심양, 청주)라 늘 노상에 있는 나는 길 위에서도 안방 같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아마 내가 먼저 주위에 편안한 눈빛을 발산하나 보다. 초면인데도 불쑥 말을 걸어오는 이가 있는 것이다.    


#길 하나 : 얼마 전에는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번잡한 대합실에서 젊은 엄마가 네 아이를 데리고 앉았는데, 얼핏 보기에 또 만삭이었다. 큰애가 다섯 살이라면 정말 5년 연년생이란 말인가? 아빠가 과자를 사 오자 얌전히 받아드는 꼬마들이 그리 복스럽고 귀티 흐를 수가 없었다. 그 아빠의 생명력 같은 것 앞에서는 열등감까지 느낄 정도였다. 엄마가 그윽한 눈빛으로만 넷의 일거일동을 죄다 돌볼 때는, 참았던 입이 열리고 말았던 것이다. “종, 종교가 무엇입니까?”

30대, 수려하고 윤기 있는 부부 역시 예의 있게 답해 주었다. 종교는 없는데 지금 대만으로 귀가 중이라고. 헤어지면서 나는 참 위대하다며 엄지척을 했다.


#길 둘 : “어, 차쿠 신부님 아니세요?” 요번 한국행에서는 단체 인사까지나 받았다. 

오호라, 중국 공항에서 이리 호명되다니? 차제에 아주 차쿠 신부로 만들어버릴 어기이다. 초가을 무렵, 차쿠를 다녀간 대련 한인 성당 일행이었다.


#길 셋 : 다시 비행기를 탔을 때이다. 

“아무래도 사업가는 아니신 것 같고...” 

옆 좌석의 40대 여자 둘이 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는 상으로 말을 걸어왔다. 그 후 우리는 작은 소리로나마 한 시간을 얘기했다. 내가 신부라는 것도, 그 아녜스 자매가 냉담하고 있는 속내도, 또 창가 쪽의 시모께서 모니카씨라는 것까지 술술 발설되었을 때, 이미 낯선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길 넷 : 이런 길들을 지나쳐 도착한 차쿠였다. 늘 하던 대로 성당에 들어가 인사하다가 낯선 공기를 들이쉰 것이다. 제단 위 김대건 최양업 신부님의 액자가 보이질 않았다. 암행순찰조가 편성되어 다녀갔는데 북경 직보고 라인이 있어 장하, 대련시의 관리들보다 힘세다는 허 수녀의 한마디 한마디도 낯설었다. 내년 봄, 여름에는 홍콩도 안정될 거요, 라고 얼버무린 내 목소리는 기어들어 가고 있었을 거다.


밤늦도록 순찰조에 대해 찾아보았다. 더욱 움츠리며 기어 나온 익일 아침, 그 어느 때 보다 작고 초라해진 뜨락도 낯설어졌다. 나가기조차 싫었다. 사방이 감시의 눈이 되어 차갑게 응시할 뿐, 그렇게 한나절을 오도 가도 못하던 길이었다. 그러다가는 별 것 아니었다. 옳지, 좋은 수가 있다! 하고 떠올린 일상의 소소한 아이디어일 뿐이었다. (사실 새로 산 커피포트가 있는데 마땅히 올려놓을 소반을 궁리 중이었다.) 옳지를, 교육관을 짓고 남은 대리석을 써 보자. 폐기했지만 고급 미색 대리석이었다. 


괘쾌괭! 나는 씩씩하게 돌을 자르기 시작했다. 요란한 기계톱 소리에다 더 요란히 날리는 눈보라 같은 것에는 두려움들도 훌훌 날아가기 시작한다. 노루 꼬리 만하게 짧아진 해가 겨울 서산으로 넘어갈 때, 나의 하룻길 역시 고갯마루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제 더는 차쿠가 낯설지 않아진 것이다.        

                     

‘나 같은 사람마저 중국 근대사를 끌어안지 못하면 누가 하겠나? 1840년쯤, 어쩌다가 아편과 엇비슷하게 (대거) 입항한 천주교였다. 종교는 아편이라는 저 뿌리 깊은 오해! 아편전쟁으로 쇠락한 중국 입장이고 보면 어쩔 수 없는 십자가로 받아들일 수밖에...’ 

물론 이 내용은 아니지만 파출소에 등기 메세지를 보내면서 몇 마디를 부언했다. 그랬더니 금방 온 소장의 회신이란 아무 문제 없다는 함박웃음의 이모티콘이었다. 

 

“어떻게 너는 맨날 동지섣달 꽃 본 얼굴일 수 있니?”

이런 평을 들으며 살고 싶다. 때로 낯선 고개라도 이 길 위에 혼자만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금, 보이진 않으나 그 낯익은 동행이 나에게 먼저 웃어오신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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