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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쿠뜨락/이태종 요한 신부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농부의 신학/이태종 요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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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490회 작성일 19-11-04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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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신학


세수를 해버렸다면 재미없다. 밤새 자고 난 몰골에 모자만 꾹 눌러쓰고 기왕 빨아야 할 옷가지만 걸쳐 입는다. 내사, 농부는 아니라지만 농부의 아들이었다. 식전부터 밭에 나가 땀 흘린 후에 싹 씻어 낸다면, 밥맛부터가 다른 것이다. 아침놀이라 피부 그을릴 일도 없다. 

   

며칠 전 과밀한 채소를 솎아내다가, 멀쩡한 토마토를 적과 하다가, 혹은 무성한 배나무 가지를 쳐내다가 이런 점을 느꼈다. 나도 이렇게 아까운데, 뽑히어지고 적출되고 잘려나가는 식물 쪽에서 보면 억울하지 않을까? 왜 하필 나입니까, 하지 않으려나?  


막 순교자 성월을 지내서일 거다. 바람 같은 이 한 소리는 곧장 순교자들의 그것과 연결된다. 평소 가져오던 의문이 ‘신앙 선조들은 일 년에 고작 미사 한 번 할까 말까, 성사 또한 그랬을 텐데, 성경책도 없고 교리 시간도 없었을 환경에서 어떻게 순교까지 할 수 있었을까?’ 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일자무식꾼들이었다. 물론 초창기 천주교의 성조들이야 다산 정약용을 위시하여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었다. 그러나 신앙을 위해 문전옥답 고래등 같은 기와집 다 버리고 야반도주했을 때, 산속에서의 생존만큼이나 심각한 문제가 자식의 교육이었다. 제2세대에 와서는 갑작스럽게 교육 수준이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오죽하면 최양업 신부님이 까막눈들과 재교육 시간이 어려운 공동체를 위해 밭이랑에서 부르라고 천주가사를 만드셨을까?


오늘은 아침부터 농사짓기를 흉내 내다가 얻은 수확물이 크다. 신앙의 선조들 역시 화전 농사를 짓다가 생명의 이치를 배워갔을 거라는 것! 멀쩡한 과일이라도 솎아낼 것은 과감히 솎아내야 남은 과일이 실하게 될 수 있다. 하나의 희생은 반드시 다른 결실을 가져온다. 더 좋은 품질을 만들기 위해 얼마든지 버려질 수도 있다. 그것이 농사다. 단순하고 확고한 농사의 이치가 순교를 이해하게 해주었고, 설령 그 대상이 본인이 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과감히 받아들였으리라. 이렇다고 본다면 코딱지 같은 밭뙈기라도 얼마든지 한 권의 성경책이 될 수 있고, 거기서 짓는 농사 또한 신학 神學의 시간이자 전례 거행의 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요즘 뜻밖의 재미를 보는 채소가 있다. 빨간 무인데 파종도 않고 사방에서 야금야금 뽑아먹고 있다. 사실 얘네의 부모뻘은 봄 농사의 때로 거슬러 간다. 새빨갛다 못해 자색이 도는데도 속은 백설처럼 희디희니, 달걀만 한 것을 쪼개 놓으면 보기에도 맛으로도 반찬 노릇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앙증맞은 것들을 선뜻 없애지 못하다가 그만 꽃이 피고 장다리가 되어버렸다. 그 꽃 역시 보기 좋아서는 달포를 더 놔두었다. 그러다 아예 정리해버리기로 작정한 날, 나는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팔뚝만 하게 커진 무가 세상에! 백지장처럼 가벼웠던 거다. 내부의 생명 에너지를 모두 꽃으로 씨앗으로 사방에 흩뿌렸는지 속이 텅텅 비어있었다. “질량보존의 법칙” 나는 요즘 아무 데서나 그 2세들을 뽑아 먹으며 이 물리법칙을 묵상한다. 이곳에서의 질량이 줄어들면 저곳에서의 질량이 늘어나게 마련이다. 여기의 생명이 희생되면 저기의 생명이 자라난다. 순교자들도 어쩌면 농사일에서 생명의 이치를 깨달아 힘껏 “예!” 하신 게 아니신가? 이 농사 신학 하나 끝까지 잘해서 천상 생명을 취하셨는지도 모른다.   


“라라 리리♬ 라라라∼ 리리♬”

어느 가을 아침 차쿠의 뜨락은 더욱 풍요롭다. 몰골은 일자무식꾼이지만 내사, 창문을 열고 막 클라식 FM을 틀어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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