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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쿠뜨락/이태종 요한 신부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차쿠뜨락이라 하기로 했다.

칼럼의 간판을 뭐로 할까 하다가 현재 나의 소임지가 중국 요동 차쿠이고, 또한 뒤따라오는 추상적 공간까지 함의한다면 뜨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 하면서 혀끝이 감겼다 떨어지는 발음도 산뜻하다. 여기 사람들이 웬즈園子라고해서 옥편을 찾았더니 마당, 정원, 꽃밭, , 텃밭이란 뜻이고, 국어사전엔 채소밭. 그리고 건축물에 딸려 있는 빈터, 곧 뜨락은 여지餘地를 의미하였다<더보기>


 

 

차쿠의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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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1건 조회 576회 작성일 19-07-17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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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쿠의 유령


“이 션푸, 시방 어디래요?” 하는 말투가 똑 오도곡(五道谷)에 사는 장베드로씨이다. 퉁명스런 끝에 묻어나는 속정이 끈끈하다. 

“한국에서 가족이 방문해서...... 심양에 있습니다만.”

“빨리 차쿠에 돌아와요. 그라구 수녀님한테 종즈粽子(단오절, 댓잎에 싸먹는 찹쌀주먹밥) 두고 가니, 그런 줄 아슈!”

아니 내가 놀라운 기술이라도 터득했는가. 사제로서는 한 번도 성무를 집행해 준적이 없는 차쿠이다. 또 그래서도 안 될 것이 외국인이 내국인에게 일체 종교행위를 할 수 없다는 법규가 지엄하다. 그래서 달포에 한 번 대련 보좌신부나 와야 차쿠 신자들 앞에 섰었다. 허연 백발을 해가지고 새파란 신부 옆에 만날 우두커니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미사가 끝나면 나한테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한다. 하아! 그리고 먹을 게 생기면 주례자 말고 이 복사신부한테 가져오는 것이다. 5월에 들어 온 딸기만 해도 먹다먹다 결국 쨈까지 만들었다. 이네들을 위해 도무지 한 일이 없는데 오늘은 미사 때 안 보인다고 전화까지 해주다니, 이쯤 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정작 하지 않은 게 없다(無爲而無不爲)’는 경지에 정말 도달한 건 아닌감?


암만 그래도 나는 중국의 체류법상 ‘상주常住 않음’에 다름없다. 있으면서도 있다하기에 거시기한 유령 같은 신분, 관리들이 불시에 들이치면 솔직히 일단 숨고 싶다. 그네들 역시 공무원 밥을 먹어야 하니 득이 없는 대면을 피하기도 한다. 요즘은 내가 한국 들어간 때에 와서 이리저리 묻고 사진도 찍는다고 한다. 이렇게 차쿠는 아직 제도와 꽌시關係의 중간, 출입국사무소와 파출소의 사이에서 정체불투명으로 거류중이다. 다행히 방문관리들이 점점 통일전선부에서 민정국으로, 종교국에서 여행국 쪽으로 바뀌는 추세이니, 유령 같은 거주에서 백주대처로 나설 날도 멀지 않았으리. 어쨌든 한국인 대상의 미사와 숙박은 벌써부터 하고 있질 않은가? 


사사롭게 알고 지내기로야 저 위의 고관부터 시작하여 차쿠의 어린이까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재작년 이맘때다. 차 창문을 다 열고 가는데 갑자기 “신부님!”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차를 길가에 세웠더니 4학년 정도의 여자아이들이 떼를 지어 몰려왔다. 수다를 떠는 그 애들의 눈동자에서 170년 전 똑같은 거리위의 최양업 신부님을 본 것 같아서는 멍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여기 살면서도 문서까지 산다고 서명하기에는 거시기한 신분, 그래서 당국의 최종안도 저 CCTV일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카메라를 달러 왔을 때, 나는 부러 오버하였다. “와아, 내 돈 쓰려했는데 정부에서 해주니 고마워요. 이젠 도둑 걱정도 끝!” 그런 후부터, 나는 24시간 감시의 옥에서 살고 있다. 아니! 이제는 그 앞에서 더 거룩한 체를 할 수 있다고 해야 하나? 그래, 잘 되었다. 어디 마음속까지 찍어 보렴, 종교국으로 실시간 직송되는 CCTV 앞에서 나는 도리어 천주교를 선전할 요량이다.


야옹 야옹.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밖에서는 고양이가 나를 부르고 있다. 도둑고양이인데 멸치 몇 개를 주었더니 꼭 이 시간이면 찾아와 안달복달이다. 처음에는 수녀님한데 접근했는데 이제는 귀찮을 정도로 나만 따른다. 정확히 말해 저녁 묵주의 시간만 따른다. 아장아장 내내 따라온다. 묵주를 들면 걸음걸이가 안정되는 연고인가? 아무래도 주변사물과 관조의 거리는 생겨난다. 그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무심의 거리가 고양이를 끄는 듯하다. 아무튼, 낮에는 닭들과 밤에는 고양이와의 어울림이 싫지는 않다. 더구나 요놈의 카메라 앞을 지날 때는 고양이에게 다정해질 참이려니!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라도 흉내 내듯.


차쿠의 체류가 어서 법제화되기를 희망한다. 그보다 앞서 만국공용어 아니, 이 만물공용어로서 차쿠와 더 소통하기를 소망한다. 굳이 언어화한다면 “웃으며 함께하기”, 이게 아무래도 어떤 성문법보다 든든할 성싶다.  

댓글목록

엘리님의 댓글

엘리 작성일

머리가 더 시겠어요..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