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간도 천주교와 훈춘과 김대건, 최양업 - ① 간도의 복음 전파(19세기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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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533회 작성일 19-04-10 14:05본문
3. 간도 천주교와 훈춘
① 간도의 복음 전파(19세기 말)
간도(間島) 지역은 본래 동간도(즉 북간도)와 서간도로 구분되는데, 간도라고 하면 보통 동간도 지역의 훈춘(琿春)⋅왕청(汪淸)⋅연길(延吉)⋅화룡(和龍) 네 지역을 가리킨다. 이 지역은 병자호란 이후 청에 의해 봉금 지역(封禁地域)으로 정해져 오다가 1712년(숙종 38년)에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가 건립된 후 조선 영토가 되었다. 이에 함경도 지방의 농민들은 19세기 중엽부터 이곳으로 이주하여 농지를 개간하기 시작했으며, 이 때문에 조⋅청 사이에 월경(越境) 개간이 문제가 되곤 하였다. 그러던 중 1909년 9월 7일, 일제가 청과 체결한 간도협약(間島協約)에 의해 불법적으로 청에 할양되고 말았다.
이곳에는 간도의 사도인 김영열(金英烈, 세례자 요한)과 그의 동료들에 의해 천주교 신앙이 알려지고, 공소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김영렬은 1894년 간도의 호천개[湖泉浦]에서 처음 스승 김이기(金以器)로부터 “천주교가 진교(眞敎)이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이후 스승이 동학도로 체포되어 처형된 후 김영렬은 1896년 봄 서울로 향해 가던 중 뜻하지 않게 원산(元山)에서 제5대 본당 주임 베르모렐(Vermoral, 張若瑟) 신부를 만나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영세 입교하게 되었다.
이후 김영렬은 간도 지역에 복음을 전하여 여러 동료들을 얻게 되었다. 한편 원산 본당은 베르모렐 신부가 충청도 강경(江景) 본당으로 전임되면서, 1897년 5월 23일자로 브레(Bret, 白類斯 루도비코) 신부가 제6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리하여 호천개 사람들은 브레 신부로부터 마지막 교리를 마저 배우고, 그해 성신 강립 대축일에는 그중 12명이 영세와 동시에 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이때 브레 신부는 이 12명이란 숫자가 12사도의 수와 같다 하여 그들에게 “북관(北關)의 12종도”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그중 8명만이 즉시 간도로 되돌아갔고 나머지는 원산에 정착하였다.
브레 신부가 회령 지역과 간도를 방문한 것은 12종도가 탄생한 해인 1897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였다. 이때의 순방에서 그는 간도 일대뿐만 아니라 만주의 길림성 지역까지 방문하였다. 뿐만 아니라 1898년 1월 3일에는 신자들이 구입해 놓은 함경도 회령의 공소 기와집에서 첫 미사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곳에는 지유현(타대오)이 살고 있었다. 회령에 공소를 마련한 이유는 간도의 신자들이 이곳에 모이기 쉬웠고, 또 간도에는 아직 공소를 마련할 여건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처럼 브레 신부가 첫 방문을 끝낸 1898년 3월 무렵 간도의 신자수는 모두 176명이었고, 그중 161명은 이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당시 간도 지역은 사목 관할 면에서 중국의 만주교구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이 지역의 신자들과 주민 대부분이 조선인이었으므로 만주교구의 교구장이던 귀용(Guillon) 주교는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요청을 수락하여 조선 선교사들의 활동을 용인하고 있었고,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관에서도 조선 선교사들에게 여권을 발급해 주었다.
간도의 첫 번째 공소는 1898년 말에 설정된 “부처골(佛洞, 현 용정시 지신진 신화촌) 공소”였다. 부처골은 용정(龍井)에서 8리 가량 떨어진 곳으로 1898년 초에 신자들이 이룩한 교우촌이었는데, 1898년 말 브레 신부의 방문으로 공소가 된 이래 신자들에 의해 ‘대교동(大敎洞) 공소’라 불리면서 복음 전파의 중심지가 되었다. 부처골과 함께 공소로 설정된 곳은 호천개, 싸리밭골, 삼원봉(三元峰, 즉 英岩村) 등이었으며, 이어 화룡현과 연길현 각 처에 공소가 설립됨으로써 간도의 신자수는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신자들의 노력에 의해 1900년 경에는 연길현 용정촌(龍井村)에, 그리고 1903년에는 조양하(朝陽河)에 교우촌이 이루어졌으며, 얼마 안 되어 여기에도 공소가 설립되었다.
이처럼 구교우, 즉 초기에 입교한 신자들의 활동에 힘입어 간도 지방의 교세가 확장되면서 1907년 경에는 훈춘(琿春)과 그 인근인 팔지(八池)에도 교우촌이 형성되고, 신부가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09년에는 간도 지역의 신자수가 모두 2,362명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넓은 사목 지역에 좋지 않은 기후, 일년의 대부분을 공소 순방으로 보내야 하는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본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던 브레 신부는 1908년에 이르러 병으로 몸이 쇠약해지게 되었고, 결국 그해 10월 24일에 선종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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