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주교회사 : 베이징교구를 중심으로 - ④ 공산화 이후의 베이징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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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385회 작성일 19-04-10 13:47본문
중국 천주교회사 : 베이징교구를 중심으로 - ④ 공산화 이후의 베이징교구
중국의 공산화는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다시 국⋅공(國共) 분열이 이루어진 1946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어 1949년 10월 1일 모택동(毛澤東)이 이끄는 공산당이 장개석(蔣介石)의 국민당에 승리하고 베이징에 공산당 정부를 수립하면서 완전히 공산화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베이징대교구뿐만 아니라 중국 교회 전체가 새로운 변화를 겪어야만 하였다. 1951년 초부터 공산당은 애국 대중 운동이라는 종교 정책 아래 자양(自養)⋅자전(自傳)⋅자치(自治)라는 3자 운동(三自運動)을 전개하였으며, 이를 통해 중국 교회를 교황청과 단절시키고자 하였다. 그 결과 이에 동조하지 않는 베이징의 외국 선교사들은 추방되기 시작하였고, 교회 학교와 시설들이 폐쇄되었으며, 1951년 6월 28일에는 교황 대사 리베리(Riberi)가 체포 추방되었다. 아울러 북당도 폐쇄되어 오랫동안 학교와 창고로 이용되었다. 1950년에만 해도 중국을 떠난 선교사수는 2,274명에 달하였다.
공산당의 3자 운동은 교황청이나 서양 제국과의 관계 단절을 바탕으로 공산당을 지지하도록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1955년에 이르러 애국회(愛國會) 결성으로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 무렵에는 적어도 100명의 중국인 사제, 50명의 신학생, 30명의 수도자, 약 4,000명의 신자가 수감되어 있었으며, 남아 있는 외국인은 27명(사제 16명, 수녀 11명)에 불과하였다. 이어 1957년에 결성된 관변 조직인 “중국 천주교 애국회”는 로마 교황청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이듬해부터는 독자적으로 주교를 임명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10년 뒤에 시작된 문화 혁명(1966~1976)으로 중국 교회는 다시 한 번 시련을 겪어야만 하였다. “사구(四舊, 낡은 사상⋅문화⋅풍습⋅습관) 타파”와 “계급투쟁”의 구호 아래에서 홍위병들에 의해 모든 교회는 폐쇄되거나 파괴되었으며, 성직자들은 추방되거나 살해되었다. 그 결과 교회가 지하로 숨어들게 되면서 종교 활동 또한 비밀리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모택동 생존시인 1971년에 와서 다시 문을 열 수 있던 곳은 남당뿐이었는데, 이곳에서의 미사에 참석할 수 있던 사람들은 외교관이나 외국인이었다. 그러다가 1976년에 모택동이 사망하면서 불게 된 중국의 개방 정책으로 부분적인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기 시작하였다. 신학교가 개교하였고, 1978년부터는 20~30년씩 옥고를 치른 사제들이 석방되었으며, 애국 교회는 다시 활성화되어 갔다. 이어 1979년 7월 25일에는 애국 교회의 부철산(傅鐵山) 신부가 베이징의 주교로 선임되어 오랫동안의 공석을 메우게 된다.
1648~1930년에 순교하여 1889~1956년 사이에 시복된 120명의 중국 순교자들은 2000년 10월 1일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성되었다. 이 중국 성인들은 서양 선교회 소속 33명, 중국인 사제 4명, 평신도 83명 등이다. 현재(2003년 9월 발표) 중국 애국회에는 97개 교구, 73명 주교, 2,600명 사제, 약 6,000개 성당, 500만 명 신자가 있다. 그러나 다른 자료에서는 주교 117명, 사제 약 3,600명, 신자 약 1,20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따라서 애국회의 공식 발표 외에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주교가 40여 명, 사제가 1,0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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