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주교회사 : 베이징교구를 중심으로 - ③ 공산화 이전의 베이징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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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455회 작성일 19-04-10 13:44본문
중국 천주교회사 : 베이징교구를 중심으로 - ③ 공산화 이전의 베이징교구
물리 주교 사후 베이징의 대목으로는 귀에리(Guierry) 주교 등 모두 7명의 라자리스트회 주교가 1946년까지 계속 임명되었다. 그러나 대략 1860~1899년 사이에 전개된 반(反)그리스도 운동 즉 구교운동(仇敎運動)으로 수많은 신자들이 여전히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이 구교운동이 절정에 달한 것이 바로 ‘천진 대학살’로 불리는 1870년의 천진교난(天津敎難)이다. 이때 성직자․수도자를 포함한 20명의 서양인과 신자 5만여 명이 살해되었다. 이어 1900년에는 베이징을 중심으로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이 발생하여 주교 5명, 사제 48명, 신자 2만 3천 명, 프로테스탄트인 1만 8천여 명(선교사 188명 포함)이 피살되었고, 북당을 제외한 남당․동당․서당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는데, 남당과 동당은 그 후 새로운 모습으로 재건되었다가 다시 파괴되었다.
이어 중국 사회는 1911년의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조가 멸망하고 이듬해 중화민국(中華民國)이 성립되었으며,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과 분열이 계속되었다. 그 동안 미국의 베네딕도회에서는 1925년 베이징에 도착하여 10월 1일에 보인(輔仁) 가톨릭 대학(처음 명칭은 보인 아카데미)을 설립하였으며, 1930년대까지 프란치스코회, 마리아회, 라자리스트회,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등에서 중등학교 3개와 연구소, 병원 3개소, 양로원․기숙사․인쇄소 등을 설립하였다. 1933년에 베이징시의 신자수는 12,500명이었고, 이듬해 베이징 대목구 전체의 신자수는 263,494명이었다. 그 후 1946년에 베이징 대목구가 대교구로 승격되면서 1년 전에 동양 최초의 추기경에 임명된 신언회(神言會)의 전경신(田耕莘, 토마스) 추기경이 1946년 5월 10일자로 초대 대교구장에 임명되었다.
전 추기경은 1933년 신언회에 입회하였고, 1939년에 주교로 성성되었으며, 1942년 이래 청도(靑島)의 대목을 맡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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