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주교회사 : 베이징교구를 중심으로 - ① 베이징 개교와 베이징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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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550회 작성일 19-04-10 13:41본문
중국 천주교회사 : 베이징교구를 중심으로 - ① 베이징 개교와 베이징교구
중국 천주교회사 : 베이징교구를 중심으로
① 베이징 개교와 베이징교구
베이징 지역에 그리스도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원(元) 나라 때인 13세기 중엽이었다. 그에 앞서 당나라 멸망 후 쇠퇴했던 경교(景敎, Nestorianism)는 11세기 이래로 다시 몽고(蒙古) 사회에 널리 전파되었다. 한편 천주교회에서는 1264년 세조(世祖, 쿠빌라이)가 베이징(당시의 이름은 上都)으로 천도한 지 30년 만인 1294년에 교황 니콜라오 4세의 친서를 휴대한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의 몬테 코르비노(Giovanni de Monte Corvino, 孟高味諾) 신부가 세조를 알현하였다. 이후 코르비노 신부는 성당을 건립하면서 전교에 힘썼고, 교황 클레멘스 5세는 1307년 7월 21일에 베이징대교구를 설정함과 동시에 코르비노 신부를 베이징 대주교 겸 동양의 총대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원이 쇠퇴하고 명이 흥기하면서 베이징대교구는 많은 손실을 입은 채 14세기 말에 이르러 폐지되고 말았다.
베이징 교회는 명(1368~1644) 말기에 이르러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 전교를 재개하면서 다시 설립되었다. 특히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신부는 1582년 마카오에 도착한 지 8년 여 만인 1601년 1월 24일에 베이징에 진출하여 새로 교회를 설립했으며, 1605년 8월에는 판토하(Pantoja, 龐迪我) 신부 등과 함께 남당(南堂 : 선무문천주당,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천주당)을 축성함으로써 베이징 전교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후 예수회 선교사들은 1616년의 남경 박해(南京迫害)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지만, 이를 극복하고 1644년 명이 멸망할 때까지 중국 각처로 천주교를 전파해 나갔다. 한편 1633년에는 스페인의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입국함으로써 예수회의 단독 선교가 끝나게 되었다.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의 진출은 선교 단체 사이에서 전교 방침이나 보호권(保護權, padroado) 문제를 놓고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청(淸)의 입관 이후에는 마침내 의례 논쟁(儀禮論爭, rites controversy)으로 비화되었다. 더욱이 1680년에 아우구스티노회 선교사들이, 1684년에 교황청으로부터 전교권을 인정받은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1687년에 프랑스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진출하면서 문제가 더욱 복잡해지게 되었다. 이어 포르투갈은 1576년 마카오를 보호 교구(保護敎區)로 설정한 데 이어 1690년 4월 10일에는 베이징교구와 남경교구를 보호 교구로 설정하였다. 이로써 14세기 말에 베이징대교구가 폐지된 지 300여 년 만에 베이징교구가 부활되었다.
베이징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는 절강(浙江)의 대목으로 있던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의 기에사(Chiesa, 伊大仁) 주교가 1690년에 임명되어 1701년에 베이징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의례 논쟁의 종결을 위해 1715년 3월 19일에 교황 글레멘스 11세가 칙서 <Ex illa die>를 반포하여 중국 의례에 대한 금지령을 내리면서 상황이 변하고 있었다. 그에 앞서 1698년에는 옹정제(雍正帝)가 금교령을 반포하였고, 강희제(康熙帝)는 의례 금지령에 반해 선교사 추방령과 선교 금지령을 잇달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1705년에 신자수 30만 명에 이르던 중국 교회의 교세는 크게 감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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