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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중국한국천주교회사적지




재중국천주교 사적지(성지) 일
재중국 한국천주교회사 관련 사적지(=성지)(자료: 차쿠성지 이태종 요한 신부)

1831년 9월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로부터 조선대목구로 설정된 한국천주교의 모교회는 중국 북경교구이다. 그래서 중국 내에는 한국천주교와 관련된 유서깊은 사적지가 많은데, 아래는 그 대표적인 다섯 곳이다.  

사적지현소재지대표적인 사료역사적 의의
마가자
(서만자)
내몽고 적봉시 동산향
(하북 장가구시 숭례)
조선 초대교구장 
소주교(발트 로메오 브르기에르)의 서한,일기
북만주 '뺄리꾸' 교우촌이라 일컬어 졌던 이곳은 
대룩을 횡단하던 선교사들의 오아시스 같았던 곳, 
1835년10월경 소주교는 
부근에서 사망한 후 이곳에 안장. 
지금은 적봉교구 소속 사제 2~3명이 성무 집행 중.
소주와 상해
당시 '소주시 곤산현'
(=쿤산 내의 출생지,
현재 위치 아직 불분명)
상해시 
김가항, 
서가회
파리외방선교회 고문서고.
한국교회사 연구소
중국 교회사 개관
1794년 북경 구베아 주교는 
소주 곤산현 출신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조선에 파견.
1795년 정월에 초대신부로 
서울 도착시 한국 신자 4000여명.
이후 6년간 성무 집행.
1801년 신유박해 때 치명함.
차쿠와 
양관

(백가점) 

요녕성 장하시(차쿠),
개주시(양관)
김대건의 4,5,6,7번째 편지.
최양업의 사목 선서문(1849년6월21일): 최근 발견됨.
리델주교(6대 교구장)의 편지
차쿠와 백가점에 대해서는 
미구에 양업교회사 연구소 발표 예정.
차쿠는 최양업 신부님의 첫 사목지/
1868년(병인박해) 직후 조선교구 대표부 설치 후, 
제2차 조선교구 성직자회의(시노드) 개최.
신학교 소재지.
양관은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주교서품지.
1838년 이후 조선에 파견될 사제들의 대기소 역할.
요녕 교구의 초대 주교좌 본당

마카오

(홍콩) 

아오먼 특별행정자치구
1836년12월3일 서울을 출발한 
3명의 신학생이 1837년6월7일 
마카오 신학교에 도착.
이후 5년간 신학과정 공부.
파리외방전교회의 극동대표부와 대신학교가 
이곳에 함께 있었고, 
김대건, 최양업의 스승인 르그레주와 신부와 
리부와 신부 등이 재직함.
까모에스 공원내에 
김대건 동상이 세워져 있는 곳이 
신학교 자리임.
소팔가자장춘 합릉 서쪽6킬로 지점
김대건 신부의 8번째, 9번째 편지.
최양업 신부님의 2번째 편지.
페레올 고주교의 편지, 일기.
1844년 12월 김대건,최양업 동시 부제 서품지.
이후 최양업 부제는 소팔가자에서 
4년간 더 머물며 부제실습과 
어린학생들을 가르치며 사목을 도왔음.
현재 길림교구 소속 사제 2명이 성무 집행 중.
길림교구와 수원교구 자매결연

이 유인물의 복사 배포시에는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무단 복사배포는 원하지 않습니다.) 


 

재중국천주교 사적지(성지) 일
재중국 한국천주교회사 관련 사적지(=성지)

(자료: 차쿠성지 이태종 요한 신부)

1831년 9월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로부터 조선대목구로 설정된 한국천주교의 모교회는 중국 북경교구이다. 그래서 중국 내에는 한국천주교와 관련된 유서깊은 사적지가 많은데, 아래는 그 대표적인 다섯 곳이다.  

사적지현소재지대표적인 사료역사적 의의
마가자
(서만자)

내몽고 적봉시 동산향
(하북 장가구시 숭례)

조선 초대교구장
소주교(발트 로메오 브르기에르)의 서한,일기
북만주 '뺄리꾸' 교우촌이라 일컬어 졌던 이곳은
대룩을 횡단하던 선교사들의 오아시스 같았던 곳,
1835년10월경 소주교는
부근에서 사망한 후 이곳에 안장.
지금은 적봉교구 소속 사제 2~3명이 성무 집행 중.
소주와 상해당시 '소주시 곤산현'
(=쿤산 내의 출생지,
현재 위치 아직 불분명)
상해시
김가항,
서가회
파리외방선교회 고문서고.
한국교회사 연구소
중국 교회사 개관
1794년 북경 구베아 주교는
소주 곤산현 출신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조선에 파견.
1795년 정월에 초대신부로
서울 도착시 한국 신자 4000여명.
이후 6년간 성무 집행.
1801년 신유박해 때 치명함.
차쿠와 
양관

(백가점) 

요녕성 장하시(차쿠),
개주시(양관)
김대건의 4,5,6,7번째 편지.
최양업의 사목 선서문(1849년6월21일): 최근 발견됨.
리델주교(6대 교구장)의 편지
차쿠와 백가점에 대해서는
미구에 양업교회사 연구소 발표 예정.
차쿠는 최양업 신부님의 첫 사목지/
1868년(병인박해) 직후 조선교구 대표부 설치 후,
제2차 조선교구 성직자회의(시노드) 개최.
신학교 소재지.
양관은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주교서품지.
1838년 이후 조선에 파견될 사제들의 대기소 역할.
요녕 교구의 초대 주교좌 본당

마카오

(홍콩) 

아오먼 특별행정자치구1836년12월3일 서울을 출발한
3명의 신학생이 1837년6월7일
마카오 신학교에 도착.
이후 5년간 신학과정 공부.
파리외방전교회의 극동대표부와 대신학교가
이곳에 함께 있었고,
김대건, 최양업의 스승인 르그레주와 신부와
리부와 신부 등이 재직함.
까모에스 공원내에
김대건 동상이 세워져 있는 곳이
신학교 자리임.
소팔가자장춘 합릉 서쪽6킬로 지점김대건 신부의 8번째, 9번째 편지.
최양업 신부님의 2번째 편지.
페레올 고주교의 편지, 일기.
1844년 12월 김대건,최양업 동시 부제 서품지.
이후 최양업 부제는 소팔가자에서
4년간 더 머물며 부제실습과
어린학생들을 가르치며 사목을 도왔음.
현재 길림교구 소속 사제 2명이 성무 집행 중.
길림교구와 수원교구 자매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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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천주교회사 개요(북경을 중심으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656회 작성일 19-04-10 11:29

본문

중국 천주교회사 개요

(북경을 중심으로)


 

1. 북경 개교와 북경교구


북경 지역에 그리스도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원() 나라 때인 13세기 중엽이었다. 그에 앞서 당나라 멸망 후 쇠퇴했던 경교(景敎, Nestorianism)11세기 이래로 다시 몽고(蒙古) 사회에 널리 전파되었다. 한편 천주교회에서는 1264년 세조(世祖, 쿠빌라이)가 북경(당시의 이름은 上都)으로 천도한 지 30년 만인 1294년에 교황 니콜라오 4세의 친서를 휴대한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의 몬테 코르비노(Giovanni de Monte Corvino, 孟高味諾) 신부가 세조를 알현하였다. 이후 코르비노 신부는 성당을 건립하면서 전교에 힘썼고, 교황 클레멘스 5세는 1307721일에 북경대교구를 설정함과 동시에 코르비노 신부를 북경 대주교 겸 동양의 총대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원이 쇠퇴하고 명이 흥기하면서 북경대교구는 많은 손실을 입은 채 14세기 말에 이르러 폐지되고 말았다.


북경 교회는 명(13681644) 말기에 이르러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 전교를 재개하면서 다시 설립되었다. 특히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신부는 1582년 마카오에 도착한 지 8년 여 만인 1601124일에 북경에 진출하여 새로 교회를 설립했으며, 16058월에는 판토하(Pantoja, 龐迪我) 신부 등과 함께 남당(南堂)을 축성함으로써 북경 전교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후 예수회 선교사들은 1616년의 남경 박해(南京迫害)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지만, 이를 극복하고 1644년 명이 멸망할 때까지 중국 각처로 천주교를 전파해 나갔다. 한편 1633년에는 스페인의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입국함으로써 예수회의 단독 선교가 끝나게 되었다.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의 진출은 선교 단체 사이에서 전교 방침이나 보호권(保護權, padroado) 문제를 놓고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의 입관 이후에는 마침내 의례 논쟁(儀禮論爭, rites controversy)으로 비화되었다. 더욱이 1680년에 아우구스티노회 선교사들이, 1684년에 교황청으로부터 전교권을 인정받은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1687년에 프랑스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진출하면서 문제가 더욱 복잡해지게 되었다. 이어 포르투갈은 1576년 마카오를 보호 교구(保護敎區)로 설정한 데 이어 1690410일에는 북경교구와 남경교구를 보호 교구로 설정하였다. 이로써 14세기 말에 북경대교구가 폐지된 지 300여 년 만에 북경교구가 부활되었다. 당시 북경에는 남당을 비롯하여 예수회의 샬(A. Schall, 湯若望) 신부가 1653년에 건립한 동당(東堂),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1703년에 건립한 북당(北堂) 등 세 개의 천주당이 있었다.


북경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는 절강(浙江)의 대목으로 있던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의 기에사(Chiesa. 伊大仁) 주교가 1690년에 임명되어 1701년에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의례 논쟁의 종결을 위해 1715319일에 교황 글레멘스 11세가 칙서 <Ex illa die>를 반포하여 중국 의례에 대한 금지령을 내리면서 청의 강희제(康熙帝)는 선교사 추방령과 선교 금지령을 잇달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1705년에 신자수 30만 명에 이르던 중국 교회의 교세는 크게 감소하였다. 한편 1699년 포교성성(지금의 인류복음화성)에 의해 중국에 파견된 라자리스트회[遣使會]에서는 옹정제(雍正帝)의 허락을 얻어 1725년에 서당(西堂)을 건립할 수 있었는데, 이미 그 전해에 옹정제가 금교령을 반포함으로써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고 있었다.

 

 

2. 교구 분할과 박해의 연속


북경교구는 1696년에 산서(山西)와 섬서(陝西) 대목구가 분리된 이래 1831년에 조선(朝鮮) 대목구, 1838년에 요동(遼東) 대목구(1840년에 만주 대목구로 개칭됨), 1839년에 산동교구(山東敎區)를 분리하는 등 1940년대까지 70개에 이르는 교구와 지목구를 분할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1856년에는 북경교구가 북직예(北直隸) 대목구 등 3개의 대목구로 분리되었다. 당시 북경의 신자수는 약 17,000명이었다. 그리고 1946411일의 교령에 의해 중국 교회의 교계 제도가 설정되면서 전국이 20개의 대교구 관구, 79개의 교구로 개편됨과 동시에 북경 대목구는 북경 관구를 관할하는 대교구로 승격되었다.


건륭제(乾隆帝, 재임 기간 : 17361795), 가경제(嘉慶帝, 재임 기간 : 17961820), 도광제(道光帝, 재임 기간 : 18211850)로 이어지는 박해 기간 동안 북경교구장은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그러다가 17821215일에는 다시 포르투갈 출신의 재속 사제로 프란치스코 제3회 회원인 구베아(Gouvea, 湯士選 알렉산델) 신부가 북경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듬해 212일에 인도의 고아에서 주교 성성식을 갖고 1785118일 북경에 부임하여 남당에 거처하였다.


1773721일 예수회가 해산되면서 북경교구는 큰 변화를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교황청에서는 1783127일부터 이전에 예수회가 담당해 오던 전교 사업을 라자로회에서 인수받도록 하였으며, 프랑스 국왕이 그 권한을 위임받았다. 이에 따라 1217일에 프랑스 국왕과 포교성에 의해 중국 선교사로 임명된 라자리스트 로(N. J. Raux, 羅廣祥 혹은 羅旋閣) 신부와 길랭(Ghislain, 吉德明) 신부, 파리(Paris, 巴茂正) 수사가 17854월 북경에 도착하여 5월부터 북당에서 거처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북당에는 궁정에서 수학자로 활동하던 그라몽(J. J. de Grammont, 梁東材) 신부, 방타봉(de Ventavon) 신부 등 6명의 프랑스 예수회원들과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원으로 궁정 화가였던 판지(J. Panzi, 潘廷璋) 수사 등이 남아 있었다. 로 신부는 북당의 프랑스 선교 단장으로서 흠천감(欽天監) 부감(副監)일을 맡기도 하였는데, 180111월에 로 신부가 사망한 뒤에는 길랭 신부가 선교 단장을 맡아 1812년까지 중국인 성직자 양성에 노력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180876일 사망하기까지 건륭제의 신임을 얻어 흠천감 감정(監正)과 국자감(國子監)의 산학관장(算學館長)을 역임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북경 신학교를 설립하여 중국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데도 노력하였다. 그의 사망에 앞서 180412월에는 포르투갈 출신의 라자리스트 수자 사라이바(Souza-Saraiva) 신부가 계승권을 가진 북경교구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다. 당시 그는 마카오에 있었는데, 이후 구베아 주교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1805년에 재개된 박해 때문에 북경에 부임하지 못하고 181816일에 사망하였다. 1811년에도 다시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먼저 서당 선교사들이 마카오로 추방되고 성당은 몰수되었다. 동당 선교사들은 1813년부터 감시를 받게 된 데다가 화재로 인해 성당을 제외한 건물이 전소되었으며, 결국 가경제의 성당 압류와 파괴로 선교사들이 모두 남당으로 이전해야만 하였다. 한편 북당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프랑스 라자리스트 라미오(Lamiot, 南彌德) 신부가 1819년에 마카오로 추방되면서 포르투갈 라자리스트 세라(Serra, 高守謙) 신부가 대신 북당을 관리하게 되었다.


수자 사라이바 주교가 사망한 뒤 북경교구는 남당에 있던 포르투갈 라자리스트회의 리베이로 눈(Ribeiro Nunes) 신부가 총대리의 자격으로 교구를 관리하였다. 그러다가 리베이로 신부가 1826년에 사망하면서 남경교구장인 포르투갈 라자리스트 피레스 페레이라(Pirés-Pereira) 주교가 1838년까지 북경교구를 아울러 관할하였다. 피레스 주교는 1806년에 이미 남경교구장에 임명되었으나 박해 때문에 그대로 북경의 남당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결국 북당은 1826년에 세라 신부가 마카오로 떠나면서 일시 폐쇄되었고, 남당은 1838년 이후 한때 러시아 교회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후 중국 교회의 박해는 1842년 남경조약(南京條約)이 체결되고 문호가 개방되면서 완화되기 시작하였고, 1844년의 황포조약(黃埔條約)으로 신앙의 자유가 획득되면서 북당이 재건되었다. 이 무렵 북경교구의 선교는 라자리스트회의 카스트로 무라(Castro e Moura) 신부 등이 담당하였는데, 특히 그는 포르투갈 출신으로 보호권을 유지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후 북경교구는 1840년 초대 몽고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라자리스트회의 물리(Mouly) 주교가 1846년부터 관리를 맡게 되었고, 1856년에는 그가 북직예 대목구(즉 북경 대목구)의 대목을 맡아 1868년까지 활동하였다. 당시 북경 대목구의 신자수는 약 24,000명이었다.


 

3. 공산화 이전의 북경교구


물리 주교 사후 북경의 대목으로는 귀에리(Guierry) 주교 등 모두 7명의 라자리스트회 주교가 1946년까지 계속 임명되었다. 그러나 대략 18601899년 사이에 전개된 반()그리스도 운동 즉 구교운동(仇敎運動)으로 수많은 신자들이 여전히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이 구교운동이 절정에 달한 것이 바로 천진 대학살로 불리는 1870년의 천진교난(天津敎難)이다. 이때 성직자수도자를 포함한 20명의 서양인과 신자 5만여 명이 살해되었다. 이어 1900년에는 북경을 중심으로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이 발생하여 주교 5, 사제 48, 신자 23천 명, 프로테스탄트인 18천여 명(선교사 188명 포함)이 피살되었고, 북당을 제외한 남당동당서당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는데, 남당과 동당은 그 후 새로운 모습으로 재건되었다가 다시 파괴되었다.


이어 중국 사회는 1911년의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조가 멸망하고 이듬해 중화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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