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주교회사 개요(북경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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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656회 작성일 19-04-10 11:29본문
중국 천주교회사 개요
(북경을 중심으로)
1. 북경 개교와 북경교구
북경 지역에 그리스도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원(元) 나라 때인 13세기 중엽이었다. 그에 앞서 당나라 멸망 후 쇠퇴했던 경교(景敎, Nestorianism)는 11세기 이래로 다시 몽고(蒙古) 사회에 널리 전파되었다. 한편 천주교회에서는 1264년 세조(世祖, 쿠빌라이)가 북경(당시의 이름은 上都)으로 천도한 지 30년 만인 1294년에 교황 니콜라오 4세의 친서를 휴대한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의 몬테 코르비노(Giovanni de Monte Corvino, 孟高味諾) 신부가 세조를 알현하였다. 이후 코르비노 신부는 성당을 건립하면서 전교에 힘썼고, 교황 클레멘스 5세는 1307년 7월 21일에 북경대교구를 설정함과 동시에 코르비노 신부를 북경 대주교 겸 동양의 총대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원이 쇠퇴하고 명이 흥기하면서 북경대교구는 많은 손실을 입은 채 14세기 말에 이르러 폐지되고 말았다.
북경 교회는 명(1368~1644) 말기에 이르러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 전교를 재개하면서 다시 설립되었다. 특히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신부는 1582년 마카오에 도착한 지 8년 여 만인 1601년 1월 24일에 북경에 진출하여 새로 교회를 설립했으며, 1605년 8월에는 판토하(Pantoja, 龐迪我) 신부 등과 함께 남당(南堂)을 축성함으로써 북경 전교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후 예수회 선교사들은 1616년의 남경 박해(南京迫害)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지만, 이를 극복하고 1644년 명이 멸망할 때까지 중국 각처로 천주교를 전파해 나갔다. 한편 1633년에는 스페인의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입국함으로써 예수회의 단독 선교가 끝나게 되었다.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의 진출은 선교 단체 사이에서 전교 방침이나 보호권(保護權, padroado) 문제를 놓고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청(淸)의 입관 이후에는 마침내 의례 논쟁(儀禮論爭, rites controversy)으로 비화되었다. 더욱이 1680년에 아우구스티노회 선교사들이, 1684년에 교황청으로부터 전교권을 인정받은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1687년에 프랑스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진출하면서 문제가 더욱 복잡해지게 되었다. 이어 포르투갈은 1576년 마카오를 보호 교구(保護敎區)로 설정한 데 이어 1690년 4월 10일에는 북경교구와 남경교구를 보호 교구로 설정하였다. 이로써 14세기 말에 북경대교구가 폐지된 지 300여 년 만에 북경교구가 부활되었다. 당시 북경에는 남당을 비롯하여 예수회의 샬(A. Schall, 湯若望) 신부가 1653년에 건립한 동당(東堂),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1703년에 건립한 북당(北堂) 등 세 개의 천주당이 있었다.
북경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는 절강(浙江)의 대목으로 있던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의 기에사(Chiesa. 伊大仁) 주교가 1690년에 임명되어 1701년에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의례 논쟁의 종결을 위해 1715년 3월 19일에 교황 글레멘스 11세가 칙서 <Ex illa die>를 반포하여 중국 의례에 대한 금지령을 내리면서 청의 강희제(康熙帝)는 선교사 추방령과 선교 금지령을 잇달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1705년에 신자수 30만 명에 이르던 중국 교회의 교세는 크게 감소하였다. 한편 1699년 포교성성(지금의 인류복음화성)에 의해 중국에 파견된 라자리스트회[遣使會]에서는 옹정제(雍正帝)의 허락을 얻어 1725년에 서당(西堂)을 건립할 수 있었는데, 이미 그 전해에 옹정제가 금교령을 반포함으로써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고 있었다.
2. 교구 분할과 박해의 연속
북경교구는 1696년에 산서(山西)와 섬서(陝西) 대목구가 분리된 이래 1831년에 조선(朝鮮) 대목구, 1838년에 요동(遼東) 대목구(1840년에 만주 대목구로 개칭됨), 1839년에 산동교구(山東敎區)를 분리하는 등 1940년대까지 70개에 이르는 교구와 지목구를 분할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1856년에는 북경교구가 북직예(北直隸) 대목구 등 3개의 대목구로 분리되었다. 당시 북경의 신자수는 약 17,000명이었다. 그리고 1946년 4월 11일의 교령에 의해 중국 교회의 교계 제도가 설정되면서 전국이 20개의 대교구 관구, 79개의 교구로 개편됨과 동시에 북경 대목구는 북경 관구를 관할하는 대교구로 승격되었다.
건륭제(乾隆帝, 재임 기간 : 1736~1795), 가경제(嘉慶帝, 재임 기간 : 1796~1820), 도광제(道光帝, 재임 기간 : 1821~1850)로 이어지는 박해 기간 동안 북경교구장은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그러다가 1782년 12월 15일에는 다시 포르투갈 출신의 재속 사제로 프란치스코 제3회 회원인 구베아(Gouvea, 湯士選 알렉산델) 신부가 북경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듬해 2월 12일에 인도의 고아에서 주교 성성식을 갖고 1785년 1월 18일 북경에 부임하여 남당에 거처하였다.
1773년 7월 21일 예수회가 해산되면서 북경교구는 큰 변화를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교황청에서는 1783년 12월 7일부터 이전에 예수회가 담당해 오던 전교 사업을 라자로회에서 인수받도록 하였으며, 프랑스 국왕이 그 권한을 위임받았다. 이에 따라 12월 17일에 프랑스 국왕과 포교성에 의해 중국 선교사로 임명된 라자리스트 로(N. J. Raux, 羅廣祥 혹은 羅旋閣) 신부와 길랭(Ghislain, 吉德明) 신부, 파리(Paris, 巴茂正) 수사가 1785년 4월 북경에 도착하여 5월부터 북당에서 거처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북당에는 궁정에서 수학자로 활동하던 그라몽(J. J. de Grammont, 梁東材) 신부, 방타봉(de Ventavon) 신부 등 6명의 프랑스 예수회원들과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원으로 궁정 화가였던 판지(J. Panzi, 潘廷璋) 수사 등이 남아 있었다. 로 신부는 북당의 프랑스 선교 단장으로서 흠천감(欽天監) 부감(副監)일을 맡기도 하였는데, 1801년 11월에 로 신부가 사망한 뒤에는 길랭 신부가 선교 단장을 맡아 1812년까지 중국인 성직자 양성에 노력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1808년 7월 6일 사망하기까지 건륭제의 신임을 얻어 흠천감 감정(監正)과 국자감(國子監)의 산학관장(算學館長)을 역임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북경 신학교를 설립하여 중국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데도 노력하였다. 그의 사망에 앞서 1804년 12월에는 포르투갈 출신의 라자리스트 수자 사라이바(Souza-Saraiva) 신부가 계승권을 가진 북경교구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다. 당시 그는 마카오에 있었는데, 이후 구베아 주교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1805년에 재개된 박해 때문에 북경에 부임하지 못하고 1818년 1월 6일에 사망하였다. 1811년에도 다시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먼저 서당 선교사들이 마카오로 추방되고 성당은 몰수되었다. 동당 선교사들은 1813년부터 감시를 받게 된 데다가 화재로 인해 성당을 제외한 건물이 전소되었으며, 결국 가경제의 성당 압류와 파괴로 선교사들이 모두 남당으로 이전해야만 하였다. 한편 북당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프랑스 라자리스트 라미오(Lamiot, 南彌德) 신부가 1819년에 마카오로 추방되면서 포르투갈 라자리스트 세라(Serra, 高守謙) 신부가 대신 북당을 관리하게 되었다.
수자 사라이바 주교가 사망한 뒤 북경교구는 남당에 있던 포르투갈 라자리스트회의 리베이로 눈(Ribeiro Nunes) 신부가 총대리의 자격으로 교구를 관리하였다. 그러다가 리베이로 신부가 1826년에 사망하면서 남경교구장인 포르투갈 라자리스트 피레스 페레이라(Pirés-Pereira) 주교가 1838년까지 북경교구를 아울러 관할하였다. 피레스 주교는 1806년에 이미 남경교구장에 임명되었으나 박해 때문에 그대로 북경의 남당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결국 북당은 1826년에 세라 신부가 마카오로 떠나면서 일시 폐쇄되었고, 남당은 1838년 이후 한때 러시아 교회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후 중국 교회의 박해는 1842년 남경조약(南京條約)이 체결되고 문호가 개방되면서 완화되기 시작하였고, 1844년의 황포조약(黃埔條約)으로 신앙의 자유가 획득되면서 북당이 재건되었다. 이 무렵 북경교구의 선교는 라자리스트회의 카스트로 무라(Castro e Moura) 신부 등이 담당하였는데, 특히 그는 포르투갈 출신으로 보호권을 유지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후 북경교구는 1840년 초대 몽고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라자리스트회의 물리(Mouly) 주교가 1846년부터 관리를 맡게 되었고, 1856년에는 그가 북직예 대목구(즉 북경 대목구)의 대목을 맡아 1868년까지 활동하였다. 당시 북경 대목구의 신자수는 약 24,000명이었다.
3. 공산화 이전의 북경교구
물리 주교 사후 북경의 대목으로는 귀에리(Guierry) 주교 등 모두 7명의 라자리스트회 주교가 1946년까지 계속 임명되었다. 그러나 대략 1860~1899년 사이에 전개된 반(反)그리스도 운동 즉 구교운동(仇敎運動)으로 수많은 신자들이 여전히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이 구교운동이 절정에 달한 것이 바로 ‘천진 대학살’로 불리는 1870년의 천진교난(天津敎難)이다. 이때 성직자․수도자를 포함한 20명의 서양인과 신자 5만여 명이 살해되었다. 이어 1900년에는 북경을 중심으로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이 발생하여 주교 5명, 사제 48명, 신자 2만 3천 명, 프로테스탄트인 1만 8천여 명(선교사 188명 포함)이 피살되었고, 북당을 제외한 남당․동당․서당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는데, 남당과 동당은 그 후 새로운 모습으로 재건되었다가 다시 파괴되었다.
이어 중국 사회는 1911년의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조가 멸망하고 이듬해 중화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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