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조선교구 대표부와 신학교 소재지 차구
페이지 정보
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377회 작성일 19-04-12 23:07본문
2) 조선교구 대표부와 신학교 소재지 차구
차구와 양관 성당은 1866년의 병인박해 이후 다시 한국 천주교회와 깊은 관련을 맺게 된다. 왜냐하면 지리적으로 요동 땅에서도 이 지역이 조선과 가장 가까웠고, 이로 인해 1867년 이래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차구와 양관 성당에 거주하게 된 때문이다. 우선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어 중국으로 건너온 파리외방전교회의 리샤르(E. Richard, 蔡), 마르티노(A. Martineau, 南), 그리고 훗날 제7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되는 블랑(J. Blanc, 白圭三) 신부 등은 병인박해 때문에 조선으로 가지 못하고 이곳 차구에서 생활하였다. 이어 1866년 10월에 조선을 탈출하여 산동에 도착한 칼래(N. A. Calais, 姜) 신부가 차구로 와서 이들과 합류하였고,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에 승선하여 조선을 왕래했던 리델 신부도 1868년 말과 1869년 4월 말에는 차구로 와서 조선 입국을 모색하게 되었다.
1868년 12월에 리델 신부는 조선교구의 장상으로서 조선 선교사들과 함께 차구에 모여 제2차 조선교구 성직자 회의(synode)를 개최하였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과 같이 조선교구의 제1차 성직자 회의는 1857년 서울에서 개최되었고, 이때 베르뇌 주교의 <장주교윤시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가 신자들에게 반포되었다. 제2차 성직자 회의에서는 주로 조선 입국과 전교, 전교 후의 사목 방향 등에 대한 내용이 결의되었으며, 12월 8일에는 조선 선교사 모두가 이 결의문에 서명하였다.
이어 리델 신부는 1869년 1월 말 혹은 2월 초에 차구 성당을 조선 입국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만주교구장 베롤 주교와 협의하여 이 지역의 사목 관할권을 부여받기로 하였다. 베롤 주교도 이에 동의하였다. 그 결과 만주교구의 일부요 요동 교회의 중심지인 차구 지역의 사목 관할권이 조선의 선교사들에게 위임되었고, 이때 양측에서는 공동 재산 계약서까지 작성하였다. 당시 리델 신부가 이미 교황청으로부터 제6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후였다(1869년 4월 27일 교구장 임명, 1870년 6월 5일 로마 서품식).
1869년 초에는 이처럼 차구 지역의 사목 관할권 즉 재치권(jurisdictio)이 만주교구에서 조선교구로 이관되었다. 그러나 재산 계약서에서 양측의 공동 소유를 규정한 점에서 볼 때, 이 재치권은 조선 선교사들이 조선에서의 완전한 전교 활동을 획득할 때까지로 한정된 일시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조선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만주 선교사들도 차구 성당과 교회 소유 재산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한편 리델 신부나 조선 선교사들이 이후에도 자주 양관에서 머물던 사실에서 볼 때, 양관 성당의 사용이나 사목도 이 재치권 안에 포함되어 있었지 않나 추정된다. 양관 성당의 사목이 조선교구에 위임되었다면, 그 담당자는 잉츠(營口)에서 사망한 마르티노(1841~1875) 신부였을 것이다.
이후 리델 신부는 조선 교회의 장상으로서, 또 1870년 이후에는 교구장으로서 모든 활동을 이끌어나갔다. 우선 그는 조선교구의 대표부를 차구에 두었으며, 조선교구 신학교도 이곳에 설립하였다. 그리고 리샤르(1842~1880) 신부를 차구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대표부 일과 경리를 맡아보도록 하였다. 이곳 신학교에서는 1872년 이래 중국인 배 야고보, 민 다미아노 등이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한국인 요셉과 도미니코도 이곳 신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876년에 귀국하였다.
그런 다음 리델 주교는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의 문호가 개방되자 다시 조선 입국을 시도하여 이 해에 블랑 신부와 드게트(V. Deguette, 崔東鎭)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켰고, 다음해 9월 20일에는 그 자신이 두세(C. Doucet, 丁加彌) 신부 및 로베르(A. P. Robert, 金保祿)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 리델 주교는 이후 1878년 1월 28일에 체포되어 포도청에 갇혀 있다가 6월 24일 의주에서 중국으로 추방되었으며, 다시 차구로 돌아가 조선 선교사들을 위한 ????한불자전????과 ????한어문전????의 편찬에 노력하였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이처럼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는 통로가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리샤르 신부는 차구의 사목을 맡고 있었으므로 조선에 들어오지 못하다가 1880년 9월 28일 장티푸스로 사망하여 차구 성당 앞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이때부터 리델 주교는 차구의 대표부를 일본으로 이전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고, 1881년에는 마침내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대표부를 이전함과 동시에 코스트(E. Coste, 高宜善) 신부에게 그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나가사키에서 병을 얻어 다음해 프랑스로 귀국하지 않으면 안되었다(1884년 고향 반느에서 선종). 조선교구의 대표부가 나가사키로 이전됨과 동시에 조선 선교사들이 갖고 있던 요동에서의 재치권도 자연 소멸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 이전글최양업 신부님의 일곱 번째 서한에 나타난 요동 차쿠 이야기 19.04.12
- 다음글장하의 차쿠성당, 백가점성당 19.04.1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