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의 차쿠성당, 백가점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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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401회 작성일 19-04-12 23:05본문
□ 장하의 차구․백가점
1) 최양업 신부의 첫 사목지 차구․백가점
베롤 주교는 양관 성당을 건립할 즈음에 그 남쪽에 위치한 차구(Tcha Keou) 교우촌, 즉 지금의 용화산진 교우촌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840년 당시 이곳에는 110명 가량의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베롤 주교는 얼마 뒤 이곳 차구에 성당을 건립하고는 로마에 있는 ‘눈의 성모 성당’(聖母雪之殿, Notre Dame des Neiges)의 이름을 빌려 이 성당의 주보로 정하였다. 왜냐하면 이 성당은 아름답고 높은 첨탑을 가지고 있었던 데다가 차구 주변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눈이 오면 사방이 눈으로 덮여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차구 남쪽 가까이에는 아름다운 계관산(鷄冠山)이 솟아 있는데, 이러한 차구 성당의 위치에 대해 제6대 조선교구장 리델(F. Ridel, 李福明) 주교도 훗날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 성모설지전 성당은 북쪽으로는 ‘영광의 산’(蓉花山을 말하는 듯), 남쪽으로는 작은 시내에서 몇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계관산’ 사이에 있고, 이 작은 시내(즉 東岔溝)는 지금 거의 다 말라버렸습니다.”
최양업 신부는 신학생 시절부터 이곳 차구 지역과 밀접한 연관을 맺게 된다. 1842년 10월 22일 요동의 태장하(太莊河)에 상륙한 지 4일 뒤인 26일에는 차구 이웃(東岔溝 시내 건너편) 백가점(白家店) 교우촌의 두(杜) 요셉 회장댁에 머물다가 소팔가자로 올라갔었다. 아마도 당시에는 차구에 성모설지전 성당이 건립되기 이전이었을 것이다.
* 백가점 -- 김대건 신학생의 기록 : “백가점은 바다에서 (북쪽으로) 60리 가량 떨어져 있으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신자수는 약 200명 가량.”
최양업 신부는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는 고국 조선에서 가까운 요동을 향해 출발하였다. 그런 다음 같은 해 5월부터 6월 20일까지 차구 성당에 있는 베르뇌 신부 아래서 사목 실습을 하다가 1849년 6월 21일 베르뇌 신부 앞에서 ‘중국 의례(儀禮)’에 대해 규정한 교황 글레멘스 11세의 금지령 <Ex illa die>(1715년 3월 19일)와 교황 베네딕도 14세의 칙서 <Ex quo singulari>(1742년 7월 11일)를 준수할 것을 선서한 뒤 보좌 신부로 사목을 시작하였다. 중국 땅에서 중국인 신자들을 대상으로 사목을 한 첫 번째 조선인 성직자가 된 것이다.
이에 앞서 베르뇌 신부는 1848년 이전까지 양관과 사령(沙嶺)을 중심으로 사목했으며, 1849년 초에는 요양(遼陽)에 들렀다가 차구로 거처를 옮겨 생활하였다. 그 동안 양관을 주요 선교 거점으로 삼았던 베르뇌 신부가 1849년에 이르러 자신의 선교 거점을 차구로 이전한 이유는 1848년에 양관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이다. 즉, 1848년 3월 4일 만주를 순방하던 중 양관에 도착하여 그곳 사제관에서 머물던 베롤 주교가 비신자로부터 피격을 받은 것이다. 이때 가까스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베롤 주교는 다음해 4월 상해 주재 프랑스 총영사 몽티니(Montigny)에게 서한을 보내면서 조약(1844년의 황포조약)을 위반하고 비신자들이 양관 성당을 공격한 데 대해 항의하면서 조치를 취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이로 인해 베르뇌 신부는 양관 성당으로 가지 못하고 차구로 부임하였으며, 그 결과 최양업 신부가 차구에서 사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최양업 신부가 1849년 말 조선으로 귀국한 뒤에도 베르뇌 신부는 차구에 거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854년 말 조선교구장으로서 주교 서품식을 가진 뒤 조선 입국을 위해 1855년 9월 요동을 떠나게 된다. 그 후 만주교구장 베롤 주교는 한때 차구 성당에 주교관을 두고 만주를 순방했는데, 1862년 차구 성당의 신자수는 530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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