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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생 200주년 김대건,최양업 발자취를 따라서 ] 제7회 서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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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14회 작성일 24-01-24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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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서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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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만자(西灣子시완쯔)는 조선 초대 교구장 브르기에르 소주교님이 꼭 일 년 동안(1834년 10월 8일∼35년 10월 7일) 체류한 곳이고, 김대건-최양업 신학생의 유학로이기도 하다. 현주소는 하북성河北省 장가구시張家口市 숭례구崇礼區, 북경에서 서북 쪽 팔달링 만리장성을 넘어야 한다. 그러면 왜 조선 주교님이 반대 방향으로 열흘길을 가셨을까? 보호권(Padroado) 때문이다. 당시 교황청에서 강대국에 선교사 안전과 비용을 부탁하며 교회의 권한까지 주었는데, 북경 이남이 포르투갈 관할이니 프랑스인인 소주교님이야 눈치껏 떠나야 했다. 그렇다고 멀리 가지도 못했다. 북경에 오는 조선 밀사들에게 자기 교구의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필자는 2014년 순교자 성월, 심양의 선교사 수녀들과 서만자 순례를 갔다. 1000킬로가 넘는데도 고국을 떠나 “혼자 사는 사람” 넷이, 모국어로 성가를 하고 가곡도 부르다 보니 어느새 서만자 성당 같은 곳에 도착했다. 일개 ‘현縣’이었으니 한국의 ‘읍邑’ 정도 되는 규모의 도시였다. 아, 그런데 서만자 성당이 아니라는 거였다. 5분 더 가면 큰 성당이 나온다는 거였다. 지금 것도 중국으로 치면 인구 700만 명의 대도시에 1개 있을 법한 큰 성당인데, 기껏해야 7만 명 정도일 서만자에 성당이 또 있단 말인가? 그런데 진짜 5분을 가니 어마어마한 대성당이 나타났다. 완공 직전인 외관이나 내부가 명동성당의 3배는 되었다. 어떻게 이 오지에 대성당이 두 개나 될까? 우리 나름대로는 중국통들인데도 여기가 정말 중국인가 싶었다. 더 놀라운 것은 뒷산이 하나 있고 그 꼭대기를 지키는 교회 묘지였다. 일견 예스러운 비석에 새겨진 연도를 보니 300∼400년 전이나 된다. 선교지에 뼈를 묻은 벨기에의 주교 신부 수녀들이다. 그 산꼭대기에서 한눈에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일행 중 누군가가 혼잣말했다.

“그냥, 여기 눌러서 살고 싶다.”

그도 그럴 것이 늦은 점심이나 먹자고 읍내를 걷는데 도대체 길바닥이 중국 것이 아니었다. 깨끗했다. 어, 꽁초 하나 없네, 하며 올려다본 읍내 아이들 눈동자에는 70, 80년대 한국 주일학교 미사를 마치고 나온 착하고 명랑한 빛들로 총총했다.

 

1년 뒤에는 심양신학교 교수인 조건신부와 서만자를 갔다. 조신부가 마가자 출신이니 먼저 마가자에 들러 서만자로 가는 험로를 탔다. 토박이가 ‘이 길이 진짜 서만자 옛길’이라며 ‘승덕承德 지역’이 ‘열하熱河 교구’라 할 때는, 박지원 선생 생각도 나서 1200킬로가 지루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만자 본당 유신부를 만나고는, 덜컥 묻고 말았다. “큰 성당을 짓는 돈이 어디서 나느냐?” 대답인즉슨, 3,500좌석 이상이라고 했다. 인구의 90%가 신자인데 젊은 부부가 북경에서 돈을 벌면 50%를 봉헌한다고 했다. 그 말에는 필자도 지갑을 털지 않을 수 없었다.

 

또 1년 뒤엔 선물을 싣고 갔다. 부속 건물로 기념관도 짓는데 한국의 첫 주교인 소주교님과 김대건 신부님 사진을 걸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일 년 후 필자는 대문짝만한 사진 2장에다 1장을 보태며 정색을 했다. “최양업 신부님인데, 이 사진도 걸어야 다른 사진을 주겠다.” 유신부는 그 조건에 분명 고개를 끄덕였었다. 아! 어쨌든 2022년이 되면 서만자 성당이 세계의 주목을 받을 것이다. 베이징 동계 올림픽의 주무대가 서만자이기 때문이다. 차쿠 신부인 필자는 그 동계가 기다려진다. 현재 필자의 집이요 일터요 성전인 차쿠로 가기 귀한 비자 문제가 올림픽 덕분에 수월해질 것이다. 또 그래서 서만자에 가면, 먼저 기념관을 들어가 최신부님 사진부터 확인해야겠다.

 


@작성 : 이태종 사도요한 신부 (청주교구, 중국 차쿠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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