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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생 200주년 김대건,최양업 발자취를 따라서 ] 제4회 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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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13회 작성일 24-01-24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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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북경 


연경(북경)을 다녀오는 조선의 사신단을 연행사(燕行使)라고 불렀다. 사행원으로 뽑히면 진작 다녀온 선배들이 연경 가면 꼭 구경하라고 이르는 연경팔경이 있었다. 태액추풍(太液秋風) 등 도합 8곳이다. 언젠가부터 두 가지가 추가되어 연경십경이 되었다. 나머지 한 곳은 모르겠지만, 1783년 이승훈이 동지사 서장관인 부친을 따라나섰을 무렵, 추가된 볼거리로는 기둥 하나 없이도 입이 딱 벌어질 높이로 쌓아 올린 서양식 건물과 거기 가야 볼 수 있다는 코 크고 눈 파란 백인이니, 곧 서양 선교사였다. 그렇지만 이승훈은 구경이나 하려고 북당의 그라몽 신부를 찾아간 게 아니다. 몇 년 전부터 천진암과 주어사를 오간 열띤 토론의 결과들이 격하게 등을 떠밀고 있었다. 이렇게 북경교구는 조선교구의 모교회로서 태기를 띠고 있었다. 이 태아의 씨는 스스로 날아와 발아하여 자생한 것이니, 민들레 종자 같은 그 정체를 밝힌다면 <천주실의>라는 한문 서학서이다. 이승훈이 연행행로에 등 떠밀린 것도 이벽, 권철신, 권일신, 정약종, 정약용 등의, 도대체 <천주실의>의 진원을 찾고 또 다른 서학책을 구할 수는 없느냐는 빗발친 요청 때문이다. <천주실의>는 이미 1601년, 자명종이란 선물 하나로 명나라 황제 만력제 곁에 입경한 마태오 리치의 역작이다. 실로 북경교구의 복이라 할 수 있으니 이 마태오 리치의 타계 후 아담 샬이라는 과학자 출신이 못지않은 후계를 했다는 점이다. 아담 샬은 흠천감(欽天監)이란 천문대장의 벼슬까지 달고 천주교를 비약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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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두 선교사를 후원했던 권력가를 빼놓을 수는 없다. 서광계라는 인물은 상해 시절 마태오 리치에게 바오로라 세례를 받는다. 정말 다행인 것은 이 서광계가 명, 청을 연이어 승승장구한 인재형 권신이라는 점이다. 이는 또 이자성이라는 자가 난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불가능할 터였다. 농민군에 몰린 명의 마지막 황제가 자금성 뒷산에서 목을 맸고, 심양에서 명분만 노리던 청은 복수를 해주겠다며 북경에 그냥 무혈 입성했기 때문이다. 명ㆍ청의 평화로운 정권교체가 서광계를 건재케 했고, 북경의 천주교도 발전일로일 수 있었다. 물론,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가 뒤늦게 들어와 의례논쟁(제사문제)을 일으키기 전까지이다. 어쨌든 막차도 떠난 북당에 끝까지 남아 있던 그라몽 신부가 이승훈에게 조선의 첫 세례를 준 것은 ‘뿌린 대로 거둔’ 예수회 나름의 결실이라 할 것이다.

 

북경에는 동당, 서당, 남당, 북당(사진)이 있는데 남당, 북당은 필히 들러야 할 곳이다. 마테오 리치가 터를 잡고 아담 샬이 크게 신축했다는 남당보다는 몇 년 전 주교좌가 되었다는 북당에서의 미사 집전이 감동적이었다. 미사 경문을 읽을 때 어머니 교회의 심장 박동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북경에는 마태오 리치와 아담 샬의 묘역도 있다. 또 기왕에 북경을 찾았다면 자금성, 천단, 이화원, 만리장성, 용경협의 볼거리를 추천하는데, 여름철의 자금성은 극구 피했으면 한다. 그 더위를 피할 데가 없다. 물론 중국인들이 자칭 세계 3대 요리 중 하나라는 북경 오리야, 자동적으로 먹게 되어 있다.

 

@작성 : 이태종 사도요한 신부 (청주교구, 중국 차쿠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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