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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생 200주년 김대건,최양업 발자취를 따라서 ] 제1회 소팔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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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15회 작성일 24-01-24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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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소팔가자 

 

재중국 한국교회 성지들을 12군데 선정하고, 앞으로 1년 동안 1달에 한 곳씩을 소개하면서, 지면상으로나마 독자들과 함께 중국 성지순례를 떠날 참이다. 동아시아복음화원구원에서 필자에게 원고를 청탁해왔을 때 선뜻 거절하질 못했다. 필자가 지금 중국에 나가 사는 이유가 중국 선교도 있지만 최양업 신부님의 첫 사목지인 차쿠에서 시복시성을 위한 현양 운동에 일조하기 위함인데, 밝아오는 2021년이 최양업 김대건 신부님의 탄생 200주년이기 때문이다. 빼도 박도 못할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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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팔가자는 재중국 한국교회 관련 사적지 중 단연 제1번지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성직자들이 가장 많이, 가장 오래 몸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최양업 신부님은 4년 넘게 (1842,11∼1846,12) 상주하면서 소신학교 교사까지 담임했다. 2년 가까이 머물렀던 김대건 신학생 역시 이곳에서 최양업과 함께 부제품을 받는다. 1844년 12월 10일경, 조선의 첫 부제들을 탄생시킨 페레올 高주교님 역시 조선의 3대 교구장이다. 또한 소년 김대건에서 중년 최양업까지 떼려야 뗄 수 없는, 현재 대전 신학교 뒷산에 영면하고 있는 매스트르 신부 역시, 만주라고 일컫는 이 광활한 동북평원의 복판에 자리 잡은 소팔가자에서 수년을 상주했다.

 

지린성의 창춘(長春)에서 북서쪽으로 약 70리 정도 떨어져 있는 옛 교우촌(현 허링쩐合隆鎭에서 서쪽으로 8킬로 떨어진 빠지아춘八家子村)이다. 본래 대팔가자와 소팔가자 교우촌이 있었으나, 현재는 팔가자촌만이 교우촌이자 본당으로 남아 있다. 산동성에서 이주해온 여덟八가구의 천주교 신자들이 허허벌판에 동네를 차렸다고 해서 팔가자촌이다. 1838년까지 북경대목구 관할 지역이었는데 요동대목구(1840년 만주대목구로 개칭됨)가 분리 설정되면서 새 대목구의 관할 지역이 된다. 초대 요동교구장으로 임명된 파리외방전교회 베롤(E.J.F. Verrolles, 方若望) 주교는 소팔가자 일대의 광대한 토지를 매입한 뒤 성당을 건립하였다. 당시 베롤 주교의 결심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이 골목마다 우렁차게 들려오는 기도 소리였다고 한다. 이렇게 건립된 유서 깊은 성당은 1900년 의화단에 의해 파괴되었고, 1908년에 재건된 성당 역시, 지난 2017년 현재의 대성당이 신축되면서 모습을 감추었다.

 

필자는 소팔가자에서의 추억을 잊을 수 없다. 2006년 ‘김대건로路’의 빼곡한 가로수가 푸릇푸릇 물이 올라올 무렵, 서투른 중국어로 택시를 잡아탄 성지순례였다. 주임신부와 인사를 나누고 마당에 나왔을 때 성당 안에서 수십 명의 어린이가 부르는 성가 소리를 들은 거다. 티 없고도 거침없는 찬가는 금방이라도 한국인 후배를 시간 이동시켜서, 160년 전 김대건 최양업 대선배를 만나게 해 줄 것 같았다. 그렇게 멍하게 서 있는데, 성당 안의 아이들보다 훨씬 어리고 개구진 아이들이 품에 들어온 것이다. 중국인 신부가 나도 션푸神父라고 소개하기가 무섭게 사내아이 여자아이 할 것 없이 쏙 안겨들거나, 빙 둘러섰다. 그동안 1년 남짓 응어리졌던 이국의 외로움이 일시에 녹아버리고, 따뜻한 위로가 차올랐다. 그것은 국경과 민족을 초월해 자모이신 교회가 주는 위로 같았다. 시간을 초월해 최양업 김대건께서 주시는 환대 같았다. 현재 신축한 대성당은 하도 어마어마해서 그때의 아기자기함은 없어졌지만 말이다.

 

@작성 : 이태종 사도요한 신부(청주교구, 중국 차쿠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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