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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생 200주년 김대건,최양업 발자취를 따라서 ] 제10회 훈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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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12회 작성일 24-01-24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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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훈춘 


김대건 신부의 최대 업적은 선교사 입국의 해로 개척이다. 그러나 이 바닷길이라는 최후의 답을 얻기 위해서 수많은 육로를 탐색하는 헛걸음도 마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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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천지 384미터의 신령한 깊이에서 솟아난 맑고도, 살아있으며, 차가운 물은 간도에서 세 군데로 나뉜다. 먼저 남쪽으로 내린 맑은 물은 압록강이 되었다. 단동과 의주 사이를 가르며 중국과의 국경선을 그어놓았다. 중간쯤으로 흘러넘친 살아있는 물줄기는 북북서로 달려서 송화강이 되었다. 길림을 지나 하얼빈에 닿으면서 만주어로 숭가리로 불리더니, 거기서 동쪽으로 급선회하는 즉시 우수리강을 아우르며 더 굵어졌고, 아무르강과 합수되어서는 러시아의 오호츠크해로 터져나가 사할린의 코앞까지 육박한다.

 

나머지 물줄기도 차가운 유속을 늦추지 않고 투먼圖們에서 두만강이 되더니 90도 이상을 꺾었다. 서해에서 압록강으로 오르며 긋기 시작한 한반도 국경선을 동해까지 끌어다가 마감하였다. 이 두만강이 바다에 닿기 직전 한 중국 도시를 휘감았으니 바로 훈춘琿春이다. 훈춘 지역은 세 나라의 영토가 얼굴을 맞대고 있어, 러시아 쪽이 블라디보스토크요 북한의 도읍은 경원(경흥의 옛 지명)이다. 삼국이 공존하는 전형적인 국경도시에서 중국말을 해야 할지, 러시아말을 해야 할지, 조선말을 해야 할지 머뭇거리는 사이에도 돌멩이만 던지면 닿을 것 같은 강폭 사이에서, 두만강 푸른 물은 그리운 임을 부르거나 말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흐르기만 한다.

 

1844년 2월, 김대건 부제는 백두산 고원지대를 넘어 훈춘까지 왔었다. 압록강변의 변문시장과 더불어 양대 국경 시장인 두만강변의 경원시장을 통해 선교사 입국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서였다. 경원에서 일단 조선교회의 밀사를 만나는 데까지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경원시장은 고작 1년 한 번 열리는 장이었고, 백두산 고원지대를 지날 때 백수의 왕인 시베리아(아무르, 동북) 호랑이가 그야말로 개 끓듯 하였다. 결국은 다른 입국로를 찾아야 한다는 결론만 얻었을 뿐이다. 2년 후 최양업 부제도, 메스트르 교장 신부를 따라 훈춘에 당도했으나 국경수비대의 철창신세만 지다가 돌아갔다. 메스트르 신부도 결국 (자신의 실패를 돌아보니) 경원까지 잠입한 제자 김대건을 다시 평가하게 되었다는 추후의 성과만을 얻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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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 옛 터전에 연꽃이 이울어라.”로 시작되는 가톨릭 성가 287번의 “김대건 신부 노래”의 3절, “해지는 만리장성 돌베개 삼아 자고, 숭가리 언저리에 고달픈 몸이어도”는 육로를 개척하기 위함이었고 “황해의 노도엔들 꺾일 줄 있을 쏘냐?”는 해로를 개척하기 위함이었다. 김대건 신부의 눈부신 착안이란 다름 아닌 오늘날에도 꽃게 철이면 영해를 침범해서 서해 5도를 새까맣게 덮는 중국어선이었다. 공해상에서 두 나라 배가 섞여버리니 배에서 배로 옮겨타는 선교사의 입국을 무슨 재간으로 막을 수 있으랴? 이처럼 평범해서 비범한 착안과 방법도 다 훈춘 같은 데서 시행착오를 겪었던 결과물이다.

 

중국에 순례를 오든 여행을 가든 중국말 한두 개 정도 알아놓으면 좋을 텐데, 중국어 발음과 같으면서도 의미까지 똑같은 말이 몇 개 있다. 농민, 민주, 미니, 찬미 예수, 미사, 동량(일꾼) 통화 중, 농후 등등이다. 우리가 훈춘에 가서 “훈춘”하면 거기 사람들이 100퍼센트 알아들을 것이다. 중국어 발음으로도 ‘훈춘’이기 때문이다.

 

 

@작성 : 이태종 사도요한 신부 (청주교구, 중국 차쿠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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