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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생 200주년 김대건,최양업 발자취를 따라서 ] 제8회 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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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13회 작성일 24-01-24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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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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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관”은 필자가 사는 “차쿠”에서 80㎞ 떨어져 있는 촌락이다. 중국에서 80㎞ 정도는 이웃이나 마찬가지이다. 김대건, 최양업 신부도 백가점–차쿠 거주 시절에 옆집 마실가듯 이 양관을 오갔다. 800여㎞나 떨어진 소팔가자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 제4대 교구장인 베르뇌 주교, 제6대 리델 주교, 7대 블랑 주교, 8대 뮈텔 주교도 옆집 드나들 듯하였다. 차쿠에서 조선 입국을 대기하던 순교 성인 위앵, 오매트르, 브르트니에르 신부를 포함한 다수의 조선 선교사들도 ‘양지마을’인 양관을 자주 오갔다.

 

양관성당은 1838년 만주교구가 북경교구로부터 분리 설정될 당시 현 동북삼성이라고 불리는 만주 전체를 사목하던 주교좌 성당이었다. 초대 교구장인 베롤(E.J.F. Verrolles, 方若望) 주교는 양관에 성 후베르토를 주보로 하는 대성당을 신축하고 남만주 지역의 선교 중심으로 삼았다. 1843년 12월 31일 양관에서 조선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의 서품식이 있었는데 최양업, 김대건 신학생도 이때 메스트르 신부를 따라 참석했다.

 

배산임수의 지세로 미사주를 담그기 위한 포도밭이 목가적으로 펼쳐진 양관 성당에(지역민과 결탁했을 거로 추정되는) 마적 떼가 난입한 것은 1846년 7월 7일의 일이었다. 브뤼니애르 신부가 피살되었고 교회 재산이 강탈되었다. 이에 배롤 주교는 서둘러 백가점 공소(김대건 신학생이 1842년, 1843년 4통의 편지를 쓴 곳)를 차쿠 본당으로 승격시켜 그 사목적 비중을 옮긴 듯싶다. 아무튼 1849년 5월, 최양업 새 신부가 도착했을 때 차쿠는 이미 베르뇌 신부에 의해 본당의 기틀이 잡혀 있었다.

 

2021년 올 4월, 양관 터를 지키는 중국인 린씨로부터 급한 연락이 왔다. 린씨는 4, 50대의 홀아비로 노모와 함께 성당 곁에 사는데 문화대혁명 때 무너져 내린 성당의 벽돌로 집을 지었다. 양관 동네(羅甸村)의 가옥 중 절반가량이 앞다퉈 성당 벽돌을 주워다가 지은 것이 분명하다. 까무잡잡한 옛 벽돌이 그 증거물이다. 린씨가 다급하게 왈, 어떤 외교인이 공산당원과 짜고 성당 터를 20년간 빌려 대규모 돼지 농장을 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이틀을 고민하다가, 요녕교구 배주교님한테 간접화법으로나마 문자를 드렸다. “주교님, 제가 양관 터에 관심 있는 건 주교님이 제일 잘 아시잖아요?” 그랬더니, 현재 회의차 베이징에 왔는데 돌아가는 대로 자초지종을 알아보겠노라고 하셨다. 그러더니 사흘 후에 진짜 린씨한테 문자가 왔다. “신부님, 코로나 때문에 중국에 오지도 못하면서 양관까지 신경 써주어 감사합니다.” 필자는 피식 웃을 뻔했다. 린씨 자신도 성당 터에 지은 학교 건물(폐교)에 돼지 두 마리를 치지 않는가? 제발 돼지우리가 180년 전 주교좌 성당의 제대 쪽은 아니어야 할텐데, 하는 생각만 든다.

 

4년 전이었다. 청주교구의 부제반이 양관에 순례를 왔다. 필자는 중국 현지 가이드라는 입장에서 그 돼지우리가 부끄러웠다. 종교국의 눈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만으로 부끄러움을 달랠 수 없었다. 그런데 부제반을 인솔하고 온 성소국장 신부의 한마디가 반전 거리를 던져주질 않는가? “그동안 다닌 차쿠, 변문, 소팔가자, 단동, 여순감옥, 심양대성당, 백두산 천지 중에서 양관이 제일 인상적이예요. 아무리 거룩한 성전이라도 끊임없이 돌보지 않으면 돼지우리가 될 수 있구나, 라는 것을 느끼고 가요.”라는 거였다.

 

@작성 : 이태종 사도요한 신부 (청주교구, 중국 차쿠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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