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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차쿠성당 | 차쿠성지





 

차쿠(岔溝)성당 역사 "

 

 


1842년 초겨울 이미 만주의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

만주인이 아닌 몇몇 사람들이 요동 반도의 남쪽 해안(태장하太莊河)에 상륙하였다.


 

 <요동반도 http://chaku.kr/bbs/board.php?bo_table=01_guide&wr_id=3장하>

 

 

 

마카오를 떠난 조선 신학생 최양업과 김대건,

그리고 이들을 지도할 책임을 맡은 조선 선교사 매스트르 신부와

만주 선교사 브뤼기에르 신부 일행이었다.

 

 

 

이들은 요동 땅에 상륙한 뒤 '백가점'(白家店) 교우촌에 머물다가

하나둘씩 '양관'(陽關)을 거쳐 만주 북쪽의 소팔가자로 올라갔다.

 

김대건은 이 때 곧바로 북상하지 않고

1842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백가점에 거처하면서

 

봉황성 책문으로 나가 조선의 밀사를 만난 뒤

귀국로를 탐색하기도 했다.   ​<더 보기>

 


 
 





차쿠(岔溝)성당 역사 "

 

 


1842년 초겨울 이미 만주의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

만주인이 아닌 몇몇 사람들이 요동 반도의 남쪽 해안(태장하太莊河)에 상륙하였다.


 

 <요동반도 http://chaku.kr/bbs/board.php?bo_table=01_guide&wr_id=3장하>

 

 

 

마카오를 떠난 조선 신학생 최양업과 김대건,

그리고 이들을 지도할 책임을 맡은 조선 선교사 매스트르 신부와

만주 선교사 브뤼기에르 신부 일행이었다.

 

 

 

이들은 요동 땅에 상륙한 뒤 '백가점'(白家店) 교우촌에 머물다가

하나둘씩 '양관'(陽關)을 거쳐 만주 북쪽의 소팔가자로 올라갔다.

 

김대건은 이 때 곧바로 북상하지 않고

1842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백가점에 거처하면서

 

봉황성 책문으로 나가 조선의 밀사를 만난 뒤

귀국로를 탐색하기도 했다.   ​<더 보기>



 
 
차구와 백가점 교우촌

페이지 정보

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1,246회 작성일 19-04-10 09:44

본문

차구와 백가점 교우촌
      
1. 최양업 신부의 첫 사목지 차구⋅백가점


  1838년 초대 요동대목구장에 임명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베롤(E.J.F. Verrolles, 方若望 요한 프란치스코) 주교는 1840년에 ‘양관(陽關) 성당’(주보 : 성 후베르토, 현 요녕성 개주시 나전촌⋅羅甸村)을 건립한 뒤, 그 남쪽에 위치한 차구(Tcha Keou) 교우촌, 즉 지금의 용화산진 교우촌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840년 당시 이곳에는 110명 가량의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베롤 주교는 얼마 뒤 이곳 차구에 성당을 건립하고는 로마에 있는 ‘눈의 성모 성당’(聖母雪之殿, Notre Dame des Neiges)의 이름을 빌려 이 성당의 주보로 정하였다. 왜냐하면 이 성당은 아름답고 높은 첨탑을 가지고 있었던 데다가 차구 주변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눈이 오면 사방이 눈으로 덮여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차구 남쪽 가까이에는 아름다운 계관산(鷄冠山)이 솟아 있는데, 이러한 차구 성당의 위치에 대해 제6대 조선교구장 리델(F. Ridel, 李福明) 주교도 훗날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 성모설지전 성당은 북쪽으로는 ‘영광의 산’(蓉花山을 말하는 듯), 남쪽으로는 작은 시내에서 몇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계관산’ 사이에 있고, 이 작은 시내(즉 東岔溝)는 지금 거의 다 말라버렸습니다.”

  최양업 신부는 신학생 시절부터 이곳 차구 지역과 밀접한 연관을 맺게 된다. 1842년 10월 22일 요동의 태장하(太莊河)에 상륙한 지 4일 뒤인 26일에는 차구 이웃(東岔溝 시내 건너편) 백가점(白家店) 교우촌의 두(杜) 요셉 회장댁에 머물다가 소팔가자로 올라갔었다. 아마도 당시에는 차구에 성모설지전 성당이 건립되기 이전이었을 것이다.



  ◉ 베롤(Emmanuel J. F. Verolles, 1805~1878) : Verrolles로도 표기한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1831년 중국에 건너와 사천 교구에서 활동하였으며, 1838년에 만주(滿洲) 대목구(당시에는 요동 대목구)가 북경교구에서 분리 설정되면서 그 초대 대목구장에 임명되었다. 1848년에 일어난 박해로 잠시 프랑스로 귀국했다가 돌아와 활동하다가 1878년 요동 땅에서 사망하여 개주 북쪽의 잉츠(營口, 만주교구의 주교좌 성당이 있던 곳임)에서 사망했다.
  ◉ 김대건 신학생의 기록에 나오는 ‘백가점’ --- “바다에서 (북쪽으로) 60리가량 떨어져 있으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신자수는 약 200명 가량.”


  최양업 신부는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는 고국 조선에서 가까운 요동을 향해 출발하였다. 그런 다음 같은 해 5월부터 6월 20일까지 차구 성당에 있는 베르뇌 신부 아래서 사목 실습을 하다가 1849년 6월 21일 베르뇌 신부 앞에서 ‘중국 의례(儀禮)’에 대해 규정한 교황 글레멘스 11세의 금지령 <Ex illa die>(1715년 3월 19일)와 교황 베네딕도 14세의 칙서 <Ex quo singulari>(1742년 7월 11일)를 준수할 것을 선서한 뒤 보좌 신부로 사목을 시작하였다. 중국 땅에서 중국인 신자들을 대상으로 사목을 한 첫 번째 조선인 성직자가 된 것이다.


  이에 앞서 베르뇌 신부는 1848년 이전까지 양관과 사령(沙嶺)을 중심으로 사목했으며, 1849년 초에는 요양(遼陽)에 들렀다가 차구로 거처를 옮겨 생활하였다. 그 동안 양관을 주요 선교 거점으로 삼았던 베르뇌 신부가 1849년에 이르러 자신의 선교 거점을 차구로 이전한 이유는 1848년에 양관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이다. 즉, 1848년 3월 4일 만주를 순방하던 중 양관에 도착하여 그곳 사제관에서 머물던 베롤 주교가 비신자로부터 피격을 받은 것이다. 이때 가까스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베롤 주교는 다음해 4월 상해 주재 프랑스 총영사 몽티니(Montigny)에게 서한을 보내면서 조약(1844년의 황포조약)을 위반하고 비신자들이 양관 성당을 공격한 데 대해 항의하면서 조치를 취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이로 인해 베르뇌 신부는 양관 성당으로 가지 못하고 차구로 부임하였으며, 그 결과 최양업 신부가 차구에서 사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최양업 신부가 1849년 말 조선으로 귀국한 뒤에도 베르뇌 신부는 차구에 거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854년 말 조선교구장으로서 주교 서품식을 가진 뒤 조선 입국을 위해 1855년 9월 요동을 떠나게 된다. 그 후 만주교구장 베롤 주교는 한때 차구 성당에 주교관을 두고 만주를 순방했는데, 1862년 차구 성당의 신자수는 530명이었다. 



2. 조선교구 대표부와 신학교 소재지 차구


  차구와 양관 성당은 1866년의 병인박해 이후 다시 한국 천주교회와 깊은 관련을 맺게 된다. 왜냐하면 지리적으로 요동 땅에서도 이 지역이 조선과 가장 가까웠고, 이로 인해 1867년 이래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차구와 양관 성당에 거주하게 된 때문이다. 우선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어 중국으로 건너온 파리외방전교회의 리샤르(E. Richard, 蔡), 마르티노(A. Martineau, 南), 그리고 훗날 제7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되는 블랑(J. Blanc, 白圭三) 신부 등은 병인박해 때문에 조선으로 가지 못하고 이곳 차구에서 생활하였다. 이어 1866년 10월에 조선을 탈출하여 산동에 도착한 칼래(N. A. Calais, 姜) 신부가 차구로 와서 이들과 합류하였고,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에 승선하여 조선을 왕래했던 리델 신부도 1868년 말과 1869년 4월 말에는 차구로 와서 조선 입국을 모색하게 되었다.


  1868년 12월에 리델 신부는 조선교구의 장상으로서 조선 선교사들과 함께 차구에 모여 제2차 조선교구 성직자 회의(synode)를 개최하였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과 같이 조선교구의 제1차 성직자 회의는 1857년 서울에서 개최되었고, 이때 베르뇌 주교의 <장주교윤시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가 신자들에게 반포되었다. 제2차 성직자 회의에서는 주로 조선 입국과 전교, 전교 후의 사목 방향 등에 대한 내용이 결의되었으며, 12월 8일에는 조선 선교사 모두가 이 결의문에 서명하였다.


  이어 리델 신부는 1869년 1월 말 혹은 2월 초에 차구 성당을 조선 입국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만주교구장 베롤 주교와 협의하여 이 지역의 사목 관할권을 부여받기로 하였다. 베롤 주교도 이에 동의하였다. 그 결과 만주교구의 일부요 요동 교회의 중심지인 차구 지역의 사목 관할권이 조선의 선교사들에게 위임되었고, 이때 양측에서는 공동 재산 계약서까지 작성하였다. 당시 리델 신부가 이미 교황청으로부터 제6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후였다(1869년 4월 27일 교구장 임명, 1870년 6월 5일 로마 서품식).


  1869년 초에는 이처럼 차구 지역의 사목 관할권 즉 재치권(jurisdictio)이 만주교구에서 조선교구로 이관되었다. 그러나 재산 계약서에서 양측의 공동 소유를 규정한 점에서 볼 때, 이 재치권은 조선 선교사들이 조선에서의 완전한 전교 활동을 획득할 때까지로 한정된 일시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조선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만주 선교사들도 차구 성당과 교회 소유 재산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한편 리델 신부나 조선 선교사들이 이후에도 자주 양관에서 머물던 사실에서 볼 때, 양관 성당의 사용이나 사목도 이 재치권 안에 포함되어 있었지 않나 추정된다. 양관 성당의 사목이 조선교구에 위임되었다면, 그 담당자는 잉츠(營口)에서 사망한 마르티노(1841~1875) 신부였을 것이다.


  이후 리델 신부는 조선 교회의 장상으로서, 또 1870년 이후에는 교구장으로서 모든 활동을 이끌어나갔다. 우선 그는 조선교구의 대표부를 차구에 두었으며, 조선교구 신학교도 이곳에 설립하였다. 그리고 리샤르(1842~1880) 신부를 차구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대표부 일과 경리를 맡아보도록 하였다. 이곳 신학교에서는 1872년 이래 중국인 배 야고보, 민 다미아노 등이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한국인 요셉과 도미니코도 이곳 신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876년에 귀국하였다.


  그런 다음 리델 주교는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의 문호가 개방되자 다시 조선 입국을 시도하여 이 해에 블랑 신부와 드게트(V. Deguette, 崔東鎭)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켰고, 다음해 9월 20일에는 그 자신이 두세(C. Doucet, 丁加彌) 신부 및 로베르(A. P. Robert, 金保祿)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 리델 주교는 이후 1878년 1월 28일에 체포되어 포도청에 갇혀 있다가 6월 24일 의주에서 중국으로 추방되었으며, 다시 차구로 돌아가 조선 선교사들을 위한 "한불자전"과 "한어문전"의 편찬에 노력하였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이처럼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는 통로가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리샤르 신부는 차구의 사목을 맡고 있었으므로 조선에 들어오지 못하다가 1880년 9월 28일 장티푸스로 사망하여 차구 성당 앞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이때부터 리델 주교는 차구의 대표부를 일본으로 이전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고, 1881년에는 마침내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대표부를 이전함과 동시에 코스트(E. Coste, 高宜善) 신부에게 그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나가사키에서 병을 얻어 다음해 프랑스로 귀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1884년 고향 반느에서 선종). 조선교구의 대표부가 나가사키로 이전됨과 동시에 조선 선교사들이 갖고 있던 요동에서의 재치권도 자연 소멸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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