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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차쿠성당 | 차쿠성지





 

차쿠(岔溝)성당 역사 "

 

 


1842년 초겨울 이미 만주의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

만주인이 아닌 몇몇 사람들이 요동 반도의 남쪽 해안(태장하太莊河)에 상륙하였다.


 

 <요동반도 http://chaku.kr/bbs/board.php?bo_table=01_guide&wr_id=3장하>

 

 

 

마카오를 떠난 조선 신학생 최양업과 김대건,

그리고 이들을 지도할 책임을 맡은 조선 선교사 매스트르 신부와

만주 선교사 브뤼기에르 신부 일행이었다.

 

 

 

이들은 요동 땅에 상륙한 뒤 '백가점'(白家店) 교우촌에 머물다가

하나둘씩 '양관'(陽關)을 거쳐 만주 북쪽의 소팔가자로 올라갔다.

 

김대건은 이 때 곧바로 북상하지 않고

1842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백가점에 거처하면서

 

봉황성 책문으로 나가 조선의 밀사를 만난 뒤

귀국로를 탐색하기도 했다.   ​<더 보기>

 


 
 





차쿠(岔溝)성당 역사 "

 

 


1842년 초겨울 이미 만주의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

만주인이 아닌 몇몇 사람들이 요동 반도의 남쪽 해안(태장하太莊河)에 상륙하였다.


 

 <요동반도 http://chaku.kr/bbs/board.php?bo_table=01_guide&wr_id=3장하>

 

 

 

마카오를 떠난 조선 신학생 최양업과 김대건,

그리고 이들을 지도할 책임을 맡은 조선 선교사 매스트르 신부와

만주 선교사 브뤼기에르 신부 일행이었다.

 

 

 

이들은 요동 땅에 상륙한 뒤 '백가점'(白家店) 교우촌에 머물다가

하나둘씩 '양관'(陽關)을 거쳐 만주 북쪽의 소팔가자로 올라갔다.

 

김대건은 이 때 곧바로 북상하지 않고

1842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백가점에 거처하면서

 

봉황성 책문으로 나가 조선의 밀사를 만난 뒤

귀국로를 탐색하기도 했다.   ​<더 보기>



 
 
신앙선조들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재중국 교두보 차쿠성당

페이지 정보

작성자 차쿠지기 댓글 0건 조회 599회 작성일 19-03-28 07:0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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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 내용구성]

신앙선조들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재중국 교두보 차쿠성당을 중심으로


신앙선조

영적 향기를  함께 나누는  아름다운 변화의 발길 

김대건 최양업 신부의 인고(忍苦) 활동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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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쿠(岔溝)성당 역사 "

 

 

당시 조선 선교사들이 사목 중심지로 삼은 곳은

 '차쿠'(岔溝)라는 교우촌이었다.

 

현재 요동 남부의 장하 시에서

북서쪽으로 약 60-70리 지점(약 28km)에 있는 차쿠는

인근에 있는 산의 이름을 따서 용화산(蓉花山)으로 불리는데,

행정 구역상 장하 시에 속한다.

 

 

1840년대 베롤 주교는 양관 성당을 건립한 뒤,

차쿠에도 아름답고 높은 첨탑을 가진 성당을 건립하고

그 주보를 로마에 있는 '눈의 성모 성당'(聖母雪之殿)과 같은 이름으로 정하였다.

왜냐하면 차쿠 주변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눈이 오면 사방이 눈으로 덮여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 곳에 가기 위해서는

천산산맥의 끝 부분에 속해 있는 높은 산들을 넘어야 한다.

 

또 차쿠 남쪽 가까이에는 아름다운 계관산(鷄冠山)이 솟아 있는데,

이러한 차쿠의 위치에 대해 조선 선교사들은

"성모설지전 성당은 북쪽으로 영광의 산,

남쪽으로 작은 시내에서 몇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계관산 사이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차쿠 성당은 이후 또 하나의 중요한 사목 거점이 되었으며,

베르뇌 신부와 최양업 신부도 이 곳에서 잠시 활동한 적이 있었다.

 

차쿠 성당은

1860년대에 와서

다시 한국 천주교회와 깊은 관련을 맺게 되었다.

왜냐하면 요동 지역 안에서도 차쿠 성당이 조선과 가장 가까웠고,

이로써

1867년 이래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이 곳에 거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어 중국으로 건너온

파리 외방 전교회의 리샤르, 마르티노,

그리고 훗날 제7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되는 블랑 신부는

1866년의 병인박해 때문에 조선으로 가지 못하고

이 곳 차쿠에서 생활하였다.

 

이어 조선을 탈출한 칼래 신부와 리델 신부도 차쿠로 와서

조선 입국을 모색하게 되었다.

 

1869년 베롤 주교에게 요동 사목의 재치권을 부여받은 리델 신부는

조선 교회의 장상으로서,

1870년 이후에는 교구장으로서 모든 활동을 이끌어 나갔다.

 

우선 그는 조선교구의 대표부를 차쿠에 두고

그 안에 조선 신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리샤르 신부를 차쿠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하여

대표부 일과 경리를 맡아보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1876년부터

하나 둘씩 선교사들을 조선에 입국시키기 시작하였다.

한국 천주교회가 신앙의 자유에 접근하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는 통로가 열렸는데도

리샤르 신부는 차쿠의 사목을 맡고 있었으므로

조선으로 가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880년 9월 장티푸스로 사망하여

차쿠 성당 앞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동시에 리델 주교는 차쿠의 대표부를 일본으로 이전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고,

1881년에 일본을 방문하였다가 나가사키에서 발병하여

상해, 홍콩을 거쳐 다음해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이후 조선교구의 대표부가 나가사키로 이전되면서

조선 선교사들이 갖고 있던 요동에서의 재치권도

자연히 소멸되었다.


<차기진, 사목 254호(2000년 3월호), pp.8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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